나비족 외 1편
홍일표
해변에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나비를 주웠다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쓸쓸한 연애의 화석인지
나비는 날개를 접고 물결무늬로 숨 쉬고 있었다
수 세기를 거쳐 진화한 한 잎의 사랑이거나 결별인 것
공중을 날아다녀본 기억을 잊은 듯
나비는 모래 위를 굴러다니고 바닷물에 온몸을 적시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것이 나비인 줄도 모르고 하나둘 주머니에 넣는다
이렇게 무거운 나비도 있나요?
바람이 놓쳐버린 저음의 멜로디
이미 허공을 다 읽고 내려온 어느 외로운 영혼의 밀지인지도 모른다
공중을 버리고 내려오는 동안 한없이 무거워진 생각
티스푼 같은 나비의 두 날개를 펴본다 날개가 전부인 고독의 구조가 단단하다
찢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바닷속을 날아다니던 나비
사냥꾼
총에 맞은 꿩이 비로소 꿩으로 태어난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꿩의 일생은 폭발할 위험이 없다
머리에 넣은 꿩의 무게만큼 몸이 무거워진다
총성이 울린다
짧고 또렷하게 한 획으로 갈라지는 밤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입안에 넣어주는 논리학자도 있다
총을 내려놓는다 다시 바다가 출렁이고
아이들과 고라니가 풀밭을 줄였다 늘렸다 한다 둥근 풀밭이 공처럼 굴러다닌다
꿩이 날아간다
수시로 폭발하고 수시로 사라지는
하늘 어디에도 꿩은 없다
갓 태어난 원시인이 하늘을 꿩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 시집 『밀서』(문예중앙, 2015)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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