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외 1편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우회로에 있다
로그인
로그인된 나무에 새순이 돋고
아이디로 꾹꾹 입력된 꽃이 핀다
그러므로 계절이라는 사이트에
들어설 때부터 커뮤니티는 시작된다
시간의 약관에 동의한 나는
태어나 로그인된 방문자, 이리저리
흔적을 남길 때마다 기억이 스크랩된다
누군가 잠시 나를 떠올리기라도 하면
카운터가 올라간다
간혹 내가 접속하고 싶은 사람,
서로 언약한 적 없어도
그의 패스워드를 이해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일치해야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
보는 이가 많아질수록 꽃은
절정의 트래픽을 갖는다 뿌리의 한계용량에서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는 이파리가
미끄러지듯 낙하한다
변경이 필요로 한 오류범위는 바람이다
로그인을 했다가 로그아웃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나는 없다
내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경계에 접속된 순간뿐이다
어디에도 있는 나를
어디에도 없게 하는 로그아웃,
나는 태연하게 다른 곳으로 로그인된다
-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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