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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얼음과 놀다 외 1편 / 길상호

문근영 2019. 1. 19. 08:35

얼음과 놀다 외 1편 

 

  길상호



와장창, 거울 속에서

차고 딱딱한 물고기들이 튀어나왔다

벽에 박혀 있던 못이 빠지면서

십 년 넘게 고요하던

얼음 호수가 깨져버린 것,

처음으로 물밖에 나온 물고기들은

얼어 있던 목숨을 풀고

방바닥 위에서 펄떡거렸다

어떤 놈은 장판에 머리를 박은 채

가쁜 숨 몰아쉬고 있었다

꼬리지느러미를 흔들 때마다

날선 비늘이 반짝거리는

얼음 물고기를 잡으며 온종일

방안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쓰레받기에 모아둔 물고기들은

그러고 보니 하나 같이

나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눈가의 얼음 눈곱을 떼어주려다

손가락에 피 한 방울 맺혔는데

아직 따뜻한 피가 남았다는 게

새삼스레 쓸쓸한 날이었다





연못의 독서



그날도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연못은 독서에 빠져 들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침묵만 남아 무거워진 낙엽을

한 장씩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

물속에는 이미 검은 표지로 덮어놓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못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낼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림자를 뜯어

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

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다




   - 시집 『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 2016)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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