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의 가계도
정연희
호랑가시나무의 가시는 원래 꽃이었다
하늘은 고요하고 나른한 오후 목을 늘여 생각의 촉수를 뻗는데 벌과 나비들은 추파를 던지며 등에 올라타고 잡아 흔들었다 곡예단이 찾아온 장터처럼 북적거려 명상에 들 수 없었다
나무는 화려하고 요염한 헛꽃을 피워 유인하기로 했다 색과 향을 몸 안쪽 깊이 숨겼다 칩거 후 가시꽃은 표층의 외골격을 얻었다 그때부터 꽃이 아니라 가시라 불리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대지의 가슴에도 가시가 있다 얼어붙은 흙을 뚫고 차고 예리하게 반짝이는 서리꽃
하늘에도 가시가 있다 밤마다 창끝처럼 자라는 모서리 벼리는 별꽃
내 가슴에도 가시가 있다 화려한 장미꽃을 버리자 시든 꽃 위에 검붉은 꼭지 열매 한 쌍 얻었다
색도 향도 없는 꽃 영결식장의 흰 국화 다발 파티장의 색색의 알전구 같은 현란한 헛꽃들 피어났다 벌 나비가 환호하는 꽃이라 부르는 허상들
시집 『불의 정원』(천년의 시작, 2015)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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