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고 돌고
유안나
엄마와 아빠는 양쪽 끝에서
줄을 쥐고 쌩쌩 신나게 돌렸어요
언니가 뛰고 오빠가 뛸 때까지 줄은 팽팽하게 잘 돌았지요
내가 들어가 뛰려고 할 때
입이 반쯤 돌아간 아빠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엄마는 혼자서 죽을힘을 다해 줄을 돌렸지요
나는 뛰고 싶었지만 뛸 수 없었어요
일으키려 했지만 아빤 요지부동 침만 질질 흘렸어요
어쩔 수 없이 다른 줄을 찾아 달렸지요
전선이 많은 창신동 골목길을 냅다 달렸어요
엉킨 전선 하나쯤 내려와 돌려줄 것 같았어요
전선 사이에서 뛰었어요
재봉틀 바늘처럼 뛰었어요
촘촘하게 온 세상을 박음질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그만 뛰고 싶은데
골목이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지요
발바닥에 탁구공만 한 물집이 생겼어요
이제는 전봇대가, 이 골목길이, 나를 돌리고 또 돌려요
뛰면서 아기를 셋이나 낳았어요
유치원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고 군대도 보냈어요
무릎이 시큰거리는데 줄은 쌩쌩 잘도 돌아요
시집 『당신의 루우룸』(시인동네시인선, 2016)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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