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상리 / 조용미

문근영 2018. 12. 20. 02:37

상리


  조용미



  상리에 왔다 염수당 마루에 앉아 늙은 돌배나무가 피워 올린 장엄 배꽃을 바라본다 저 아래 마을에서 여기까지 구불구불 좁을 길 따라 두근거리며 올라왔다 화악산은 염수당 앞마당에 멀리 화첩을 옆으로 다 펼쳐 놓았다 오른쪽 끝자락의 고갯길을 넘으면 각북에 닿으리라


  먼 산 연둣빛 바탕에 얼핏얼핏 분홍과 흰빛 진달래 산벚나무가 서른 살 어머니 즐겨 입으시던 원피스의 물방울무늬인 듯 아른하다 나는 하필 위아래 다 검은색이어서 장엄한 돌배나무 옆에서도 흔들림 없는 단독 무늬가 되었다


  바람이 안 보이는데 꽃잎이 이러저리 떠다닌다 그 아래 들어가 물끄러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이 손은 어떤 손등을 가졌던가 가만 숨을 죽이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본다 손등의 시퍼런 핏줄을 바라보는 일이 어떤 순간 두려울 때가 있다


  꽃의 원무가 어지럽다, 멀미가 난다, 숨이 차다, 몸이 어딘가로 날아가듯 공기가 달라진다 나무는 나를 가운데 두고서 어찌 이런 춤을 추는 건가 하긴 나는 쓰러질 듯 멀리서 여기까지 우여곡절 어렵게 오긴 했다


  아아, 지고 있는 꽃들이 나를 들어올린다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지 얼마나 자주 이곳으로 끌어올릴 건지 말줄임표처럼 내 곁으로도 오고 마을 아래로도 가고 산 너머로도 가고 우주 너머 몸을 너머 그 먼 곳으로도 가려 하는 꽃잎들아


  어지러워, 이제 그만 나를 놓아 다오 몸살이 나듯 신열이 돋아나고 있다 여기 이 화엄 언덕 아래의 작은 슬픔은 얼룩 같아 보기에 좋지 않구나 이렇듯 뜨거운 몸이 되려고 나 여기 왔나 아아 열꽃이 붉게도, 붉게도 피어나고 있다



   - 시집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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