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PINO (Italy) "Maternal In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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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隱士)와 산림(山林)
지금 성리학을 하는 자들은 스스로 은사(隱士)라고 부른다. 비록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재상을 지내 의리가 나라의 근심과 슬픔을 함께해야 하는데도 벼슬하지 않는다. 비록 세 번 청하고 일곱 번 불러 그 예가 부족함이 없는데도 벼슬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자도 이 학문을 하게 되면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지라 이를 이름 하여 산림(山林)이라 한다. 그들이 벼슬 하는 것은 오로지 경연(經筵)에서 강설하거나 동궁을 가르치는 직책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만약 그들에게 전곡(錢穀)이나 갑병(甲兵), 송옥(訟獄)과 빈상(擯相)등의 일을 맡기면, 무리지어 일어나 잘못이라 하면서 유현(儒賢)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뜻으로 미루어볼진대 장차 주공(周公)은 태재(太宰)가 될 수 없고, 공자는 사구(司寇)를 맡을 수 없으며, 자로(子路)는 옥사를 판결할 수 없고, 공서화(公西華)는 빈객과 더불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인이 이런 사람을 가르친다 한들 장차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임금이 이런 사람을 불러온 들 장차 어디다 이를 쓰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기대어 글을 지어 말하기를 ‘나는 주자를 존중하여 높인다’고 한다. 아아! 주자가 어찌 일찍이 그러했더란 말인가? -〈오학론(五學論)〉 1
今爲性理之學者, 自命曰隱. 雖弈世卿相, 義共休戚, 則勿仕焉. 雖三徵七辟, 禮無虧欠, 則勿仕焉. 生長輦轂之下者, 爲此學則入山, 故名之曰山林. 其爲官也, 唯經筵講說及春坊輔導之職, 是注是擬. 若責之以錢穀甲兵訟獄擯相之事, 則羣起而病之, 以爲待儒賢不然. 推是義也, 將周公不得爲太宰, 孔子不得爲司寇, 子路不得折獄, 公西華不得與賓客言. 聖人敎斯人, 將安授之. 國君致斯人, 將安用之. 乃其所自倚以文之, 則曰我尊尙朱子, 嗚呼! 朱子何嘗然哉.
은사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산림 때문에 학문이 다 죽었다. 저 좋은 일만 하고, 남 좋은 일은 죽어도 안 한다. 대접 받으려고만 했지, 대접할 줄은 모른다. 현실의 실무를 맡기면 날 모욕하지 말라고 한다. 입으로는 모르는 게 없는데, 막상 일을 맡기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아무 짝에 쓸모없고, 식솔들만 배곯게 하는 공부를 하면서, 성현의 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추켜세운다. 학문의 길은 원래 그렇게 고달프고 고단하고 고고한 법이라고 큰소리친다. 소통을 거부하는 학문, 저 혼자 고고한 공부는 옛 성현들도 다 경멸했다.
원본글: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