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지나가는 동안 / 장순금

문근영 2018. 3. 17. 09:39

지나가는 동안

 

   장순금

 

 

 

한 사람이 몸속을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백년이 흘렀어

 

시작은 책 속에 끝을 숨기고 문장으로 나를 눌러 놓았어

심야를 달리는 트럭의 깜깜 속도 속에 우리를 숨겼어

생략된 세상에서

도벽처럼 가지에 앉아 떠는 동안

바람 사이로 피로 물든 잎들을 낳았어

한 알도 부화되지 못한 잎들은 스스로 숨을 끊어

죽은 기억 속으로 들어갔어

 

우리는 아무도 새가 되지 못했어

 

죽은 기억이 죽음 같은 고요에 발이 빠져

비릿한 향내를 봄의 무덤에 뿌리고

책 속에 숨은 무수한 벽이 서로 눈물을 닦아 주며

죽은 잎들을 펄럭이고 있었어

나는 천천히 물처럼 흘러내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보이지 않았어

 

 

                      —《문예바다》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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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금/ 1953년 부산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걸어서 가는 나라』『비누의 슬픔』『조금씩 세상 밖으로』『낯선 길을 보다』『햇빛 비타민』『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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