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포로들의 식탁 / 안태현

문근영 2017. 10. 31. 12:45

포로들의 식탁

 

   안태현

 

 

 

담장 위에 누가 가뿐하게 오를 수 있을까 치수가 큰 옷들은 이래저래 불만이 많고

 

자청해서 끼니를 건너뛰는 당신은

이상한 동맹을 맺은 듯이

외계인이 사는 지구 밖에 다녀온 것이다

 

그곳에서 들고 온

땀범벅 된 시간을 냉장고 칸칸에 보관해두고 중력을 느낄 때마다 한줌씩 꺼내먹는다

진공포장 할 수 없는 일주일 혹은 한 달

 

영양사들이 학자적인 취향으로 채소와 고기와 생선들을 분류할 때 아름다운 맛은 사라진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모든 맛이 암흑 쪽으로 사라지고 나면 이상한 동맹도 유리컵처럼 산산이 깨지는 것인지

볼모로 잡힌 원피스들이

자폐적인 병동에서 풀려나는 것인지

 

사람들의 거리에 허깨비가 가득한 시간

하얀 접시에는 냉동된 혀가 쌓이고 당신은 쇼윈도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무거운 그림자를 끌고 가며

생에도 수수밭에 일렁이는 바람처럼 헐렁하게 지나가는 시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양력을 잃은 날개였다가

번번이 되돌려져서 오감을 사로잡으려는 식탁의 내숭을 기어이 할퀴고 싶은

숨은 발톱이었다가

 

 

 

                   —《시산맥》2016년 겨울호

                   2016 「시여, 눈을 감아라」 최종 수상작 (봄7편-여름4편-가을2편-겨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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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현 / 전남 함평 출생. 광주교육대학 졸업. 2011년 계간《시안》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이달의 신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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