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초록 뱀 구두 / 김혜영

문근영 2017. 10. 31. 12:44

초록 뱀 구두

 

   김혜영

 

 

 

금요일 저녁에 앤디 워홀을 만났어

그는 공방에서 초록 뱀 구두를 디자인했지

그의 금발 머리카락이 솟구쳐 내 동공을 찔렀지

 

초록 뱀 구두를 신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어

발등에 도마뱀 비늘이 돋아났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비밀의 정원에 숨었지

 

미루나무 그림자 아래 뭔가 휙 지나가는데

바람결에 앤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아름다움은 복제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놀란 목련 꽃잎이

툭, 발 앞에 떨어졌어

 

앤디가 내게로 걸어와

목련 꽃잎을 주워 건네주었지

 

머리를 왼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지

"살짝, 치마를 올리면

발목이 가늘어 보일 거예요"

 

초록 뱀 구두는 삼각형

창문에 담긴 하늘은 사각형

미루나무 잎사귀의 숨소리를 들었을까

 

앤디는 구두코를 어루만지고

초록 뱀은 스르르 미끄러지고

미루나무 잎사귀 창문에서 사라졌어

 

푸르스름한 음악이 번지는 정원

초록 뱀 구두를 신은 유령들이 지나갔지

 

 

                         —《포지션》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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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 경남 고성 출생.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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