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재앙의 환대 / 백무산

문근영 2017. 10. 31. 12:44

재앙의 환대

 

  백무산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오니 너나없이 반긴다

염려가 아니고 이건 환대다

식당 여자는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내밀고

구멍가게 할머니는 고쟁이도 못다 추어올리고 얼굴 편다

데면데면하던 이웃도 나를 보더니 얼굴에 꽃이 폈다

좌회전하던 먼 이웃도 날 보더니 우회전하며 반긴다

 

혁대 풀고 거웃까지 보여 가며 봐봐 나도 석 달 고생했다고

한여름에 얼마나 개고생이냐고 운전은 되냐고

팔 아니라 대가리였으면 좆됐을 거 아니냐고 말은 따로 하지만

정작 재앙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

재앙이 가져다준 새잎 기억들을

 

탈 없기를 원하지만 말짱한 것은 뻔뻔한 콘크리트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을 연다는 걸

 

지난날의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별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라는 거울 앞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죽음 나의 죽음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미래가 말짱할 곳은 사막뿐 재앙이 준비돼 있지 않다면

우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

 

행복은 수백 갈래지만 재앙은 한곳을 향해 있어

우리 모두 한곳 재앙을 바라보면서 얻는 구원은

서로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내 깁스한 팔이 그들이 못 본

대홍수의 기억을 희미하게 불러일으켰을 것

 

 

 

                       —《계간 파란》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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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1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초심』『길 밖의 길』『거대한 일상』『그 모든 가장자리』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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