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피뢰 / 신두호

문근영 2017. 10. 31. 12:41

피뢰

 

  신두호

 

 

 

초점으로 빛이 모이게 되면 불이 붙을 거라고 들었는데

지켜보아도 그곳에 불길은 일어나지 않고

건넨 말 한 마디만 흥건하게 떠내려갔다

 

집중이란 우리가 개별적으로 건너야 할 강은 아니었는데

건너편의 초원에 머무는 어슴푸레한 불빛과

물살을 빚는 빛의 수다스러움을 너는 묘사해낸다

 

흔들리는 추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추의 부피와 회전에 무감각해지면서

나는 너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간다

 

네가 보는 것은 한 치 앞의 무지개에 지나지 않고

평면상의 한 점을 지나는 임의의 곡선에 그치지 않고

심지의 모서리를 차곡차곡 마련하기 위한 것

 

대화는 우리가 거쳐 온 모든 장소에 남아

허구적인 마찰은 기습적으로 바람을 부르고

손바닥에 물기가 마르던 때에도 침묵하며 걸었지만

 

밤하늘이 불길하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어서

더없이 얇은 손이 가늘고 기괴한 손가락들을 지녀서

잃어버린 말이 어둠을 한없이 물들이는 것 같았다

 

감은 눈 안의 세계가 밝아지는 순간에 네가 보이고

강물은 우리의 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으며 흐르고

속삭임으로 가능한 불빛만이 이곳을 그리겠지만

 

희미하게 불타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 초원을

가까워질수록 불투명해지는 보폭의 그림자를 가지고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말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시산맥》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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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호 / 1984년 광주 출생. 2013년《문예중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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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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