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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사는 먼 곳 지상전철이 지나갈 때 / 고형렬

문근영 2017. 10. 31. 12:28

내가 사는 먼 곳 지상전철이 지나갈 때

 

  고형렬

 

 

 

모든 것을 중지하고

 

자서전을 쓰듯 멀리 지상 전철이 지나가는

레일 소리가 절실하다

 

그 소리는 내 뼈의 영혼 속으로 침잠한다

 

먼 아침마다 문산에서 이슬을 털며 떠나온 전철

감기 마스크와 이국 여자와

학생 몇을 태우고

떠나올 때 마음은 물론 변함없지만

 

열차도 돌아갈 수 없는 한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열차는

양평에서 중앙경의선이 되어

저 삼십대의 저녁 문산으로 돌아간다

 

좋아라 차분한 발진 시작하면 야산의 능선도 따라

울릴 때도 있었다

모두 우울하고 슬픈 날만 있지 않았던

중앙선과 경의선의 연결

 

오늘 그 하나의 짐이

실내에 환한 등을 달고 가는 나의 밤 열한 시 반

이마에 라이트를 켜고

마지막 오늘의 수도를 관통해온

여덟 량의 은색 박스 속에

 

나의 꿈은 벌써 길도 없이 카시오페이아 하늘에

닿고 말았다 그때, 닿지 말 것을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그림만 그리고 있었나

그 어떤 시간만

나에겐 과거도 미래도 오늘도 아니다

 

나라고 하는 어느 당자(當者)는 일요일 오늘

그 오전

그해 나뭇가지를 손질하다가 그 레일 소리를

그만 심장 속으로 흘려보내고 말 것이다

 

 

                       —《시사사》2017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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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 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대청봉 수박밭』『해청』『시진리 대설』『성에꽃 눈부처』『김포 운호가든 집에서』『밤 미시령』『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유리체를 통과하다』『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장시『리틀 보이』『붕(鵬)새』, 동시집『빵 들고 자는 언니』등. 장시『리틀 보이』『붕(鵬)새』.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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