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9) /
새롭게 시작한 조사 및 발굴
8·15 해방 후 한국인 조사 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 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에서 실시되었다. 국립 박물관의 김재원(金載元; 1909∼1990) 관장이 지휘하고, 현지에서 경주 분관장이 협력한 시험 발굴이었다. 실측은 과거 총독부 박물관 때부터 경험이 많은 유일한 전문가인 임천(林泉; 1908∼1965), 그리고 사진 촬영은 이건중(李健中)이었다.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보물 1878호
[호우총에서 발굴된 청동 호우의 명문 을묘년국 강상광개 토지호태 왕호우십]
[호우총 출토 모습]
[호우총-경주 노서리 고분군] 사적 39호
발굴은 의외의 성과를 거뒀다. 뒤에 ‘호우총(壺杅塚)’으로 명명된 이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든 청동 합형용기가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굽 밑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명문이 양각돼 있었다. 이 호우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연대 고찰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추정되었다. 호우총에서는 그 밖에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심칠면’ 같은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다.
인접한 또 하나의 고분에서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그 후 ‘은령총(銀鈴塚)’으로 명명되었다.
1947년 5월엔 개성 남쪽의 장단군 진서면 법당방의 고려 벽화 고분이 두 번째로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 발굴 팀은 경주 고분 발굴 후 국립 박물관 연구원으로 들어온 이홍직(李弘稙; 1909∼1970), 김원룡(金元龍; 1922∼1993)을 중심으로 임천과 이건중이 이번에도 실특과 모사 그리고 사진을 담당했다. 현지에서는 당시 개성 분관원이었던 최순우(崔淳雨; 1916∼1984)가 참가했는데, 법당방 벽화 고분의 최초의 조사 발견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그 해 3월 18일, 지방의 고미술 애호가인 강필운과 함께 고적 조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3기의 고려 고분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중 가운데 것이 석실 내부에 귀중한 벽화를 지니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네 벽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관을 쓴 인물 초상이었고, 천장에는 천체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1916년에 역시 개성 남쪽인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수락암동의 석실 고분에서 발견된 이후 두 번째인 고려 고분 벽화의 출현이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당하고 없었다. 마을의 노인들의 증언은 “수십 년 전(한일합방 전후)에 수명의 일본인 도굴꾼이 총을 메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위협하면서 모두 파 갔다.”는 것이었다(이홍직, <고려 벽화분 발굴기>, 1954년).
국립 박물관 연구관에서 일할 사람들이 짜여 지면서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 문화재의 연구 조사 및 발굴 활동이 차차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48년에는 세 번째로 경주 황오리 고분이 조사 발굴 되었다. 이 해엔 또 국립 박물관의 첫 고적 조사 보고인 <호우총, 은령총>이 간행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의 정보 교환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5월의 국보 특별전 기획 등으로 더욱 틀이 잡히던 국립 박물관은 북한 공산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국립 박물관 소장 유물의 보호는 모든 박물관 직원에게 부과된 최대의 사명이었다. 다행히 박물관 문화재들은 9·28 수복까지의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무사했고, 그 후 1·4 후퇴를 전후한 5차에 걸친 부산으로의 비밀 철수 작전으로 성공적인 보호가 이루어졌지만 거기엔 위험이 따랐다.
[경주 금척리 고분군] 사적 43호
한국전쟁 중 부산에 임시 건물을 빌려 기능을 재수습하는 동안에도 국립 박물관은 제한된 연구 조사 활동을 수행했다. 1952년 3월엔 경주 금척리의 신라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경주-대구 간 도로 확장 공사로 파괴 노출된 2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 발굴이었다. 다음 해 6월과 7월에는 역시 경주 노서리에 위치하는 신라 고분 제137호와 제138호가 발굴되었다. 138호분에서는 희귀한 반형 토기와 골호 및 뚜껑이 있는 장경호 등이 출토됐다.
국립 박물관의 활동은 다시 차근차근 본궤도를 되찾고 있었다. 1955년 11월에는 경주 황오리에서 두 번째 발굴이 시도되었다. 이 때의 발굴 책임자는 당시 경주 분관장이었던 진홍섭(秦弘燮; 1918~2010) 교수였다.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공사 중 처음으로 드러난 이 고분에서는 순금 반지와 팔찌, 마구, 무기, 기타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 공포=
[칠곡 송림사 오층 전탑 사리 장엄구] 보물 325호
유리 사리병
한국전쟁 후에 새로운 보물을 탄생시킨 가장 사건적인 문화재 보수 공사가 1959년에 있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의 쓰러져 가던 통일신라시대의 5층 전탑(당시 국보 313호, 지금은 보물 189호)에 정부 예산으로 보호의 손길이 미친 것은 그 때 4월의 일이었다. 탑을 해체 수판으로 오려 만든 금빛 찬란한 작은 사리탑은 그 안에 새파란 유리로 된 너무나 아름다운 형태의 사리병을 안치하고 있었다. 또 은판을 투각한 섬세한 나무 모양의 상징적인 금구엔 금실로 고정시킨 무수한 영락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밖에도 수십 점의 각종 유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12세기의 고려청자 합 하나가 따로 발견되었는데, 이 뜻밖의 유물은 고려 중엽의 중수 사실을 말 해주는 증거였다. 현재 이 귀중한 송림사 전탑 유물들은 보물 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 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감은사지 서삼층 석탑 사리 장엄구] 보물 366호
금동 사리 외함
같은 해 12월엔 경주 동남쪽 동해안께의 감은사 터(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3층 석탑(현재 국보 112호) 2기를 해체 수리하다가 이번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미술 문화를 재확인시키는 걸작 사리 장치 유물들을 발견했다. 유물들은 동서 쌍탑 중 서쪽 탑 속에 들어 있었고, 청동제 사리기와 사각감이 나왔다. 특히 정방형의 기단을 가진 보탑형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난간 네 귀퉁이에 배치한 주악 천인들과 높직한 기단의 사면을 파고 넣은 팔부 신장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의장이었다. 이 감은사 석탑 유물들도 보물 36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는 정부 당국은 물론 매스컴을 포함한 일반 국민들의 민족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높아지던 때였다. 동시에 지난 날 일본인 도굴꾼과 악질적인 수집가들의 앞잡이 혹은 하수인으로서 매장 문화재에 관한 지식을 쌓았던 일부 골동 상인과 그들의 조직망에 의한 불법적인 도굴이 곳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돈 많은 장물아비와 수집가가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급한 문제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 공포였다.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전문 7장 73조, 부칙 3조의 이 문화재 보호법은 처음으로 문화재의 개념과 종류를 설정하고[1) 유형, 무형 문화재 2) 기념물 3) 민속자료], 정부 자문 기구로 전문적인 문화재 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 문화재 보호법은 또 매장 문화재의 처리 규정과 발견 혹은 신고자에 대한 표창(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도둑이나 임의의 취득자, 그 밖에 문화재의 불법적인 국외 반출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규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량한 매장 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응분의 표창과 보상 규정은 획기적이었다. 밭을 일구다가, 혹은 토목 공사장에서 우연히 출토시킨 문화재를 지방 행정 계통을 통하거나 문화재 관리국 또는 국립 박물관에 직접 신고했을 때, 물건의 귀중성과 가치 평가에 준해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이 규정은 골동 상인들에 의한 중간 탈취와 귀중한 발견 문화재가 또 다시 종적을 감추는 악폐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량한 발견 및 신고자를 위해서도 지극히 고무적인 조처였다.
가령 시골의 한 주민의 국보나 보물급의 유물을 우연히 출토시켰다고 할 때, 만일 뜨내기 골동 상인에게 적당히 처분하려 든다면 최소의 가격으로 빼앗기기가 일쑤다. 그리고 공돈이라고 몇 푼 받고 물건을 거저 빼앗겼다가 매장 문화재 발견의 신고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되면 그는 법에 규정된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수없이 있었다. 대개 법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다.
또 그 전까지는 매장 문화재를 발견한 사람이 그 사실을 당국에 신고한 경우에도 국가에서 적절한 표창이나 정당한 보상이 없어 섭섭히 여긴 일이 많았다. 그런 일은 발견자로 하여금 굳이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었다. 그런 모든 부당한 처사에 정부가 현실적으로 대처한 것이 ‘표창과 보상’의 명확한 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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