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8) /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국보들
인해 전술로 유엔군을 위협한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유린했을 때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유물엔 큰 피해가 없었다. 이번엔 북으로 실어 가려고 한 증거가 뚜렷했으나 기동력의 부족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다음 날엔 정부 선발대가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이번에도 미국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물건의 각별한 보호 조치를 강구했다.
미국 대사관이 이기붕(李起鵬; 1896~1960) 서울특별시장을 위해 내준 비행기에 국립 박물관의 선발대로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연구관이 편승하여 서울에 올라온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되고 부터는 이 때의 서울은 그럴 겨를이 없던 전쟁 초기와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고 있어 군인과 경찰 선발대를 제외하면 황량하고 텅 빈 도시였다. 박물관 직원으로서 혼자 서울에 올라온 최 연구관은 이번에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나이 많은 수위 한 사람을 겨우 찾아내어 박물관에 남아 있던 서역 벽화를 위시한 물건들의 포장과 부산으로의 4~5차 운반에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다. 중공군이 다시 구파발까지 육박해 오는 춘계 공세의 위험을 무릅쓴 임무 수행이었다.
2차 서울 수복 후의 두 차례에 걸친 나머지 유물의 부산 이동으로 국립 박물관과 덕수궁 미술관의 소장품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부산의 미국 대사관 차고를 임시 창고로 빌었던 유물 상자들은 뒤에 경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부산 시내의 한 약품회사 창고인 4층 콘크리트 건물로 모두 옮겨져 보호되다가 휴전과 함께 서서히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전쟁 중에도 국립 박물관, 미술관 소장의 국보와 기타 미술 문화재들은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었지만 개인 소장품과 지방 사찰의 건물과 국보급 유물 중엔 적절한 대책이 없었던 탓으로 영원히 사라지거나 행방불명이 된 것들도 있었다.
1948년 10월께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양양면 서면)에서 목기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산집을 짓다가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킨 국보급의 신라 종이 있었다.
정원 20년(신라 애장왕 5년; 804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들어 있던 이 동종은 같은 오대산 지역의 ‘상원사 동종’(725년명; 현재 국보 36호)과 경주 박물관의 ‘성덕대왕 신종’(771년명; 현재 국보 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 종으로 그것은 해방 직후의 최대의 발견이었다. 발견자인 산 속의 선량한 목기공들은 그 사실을 즉시 관계 당국에 신고했었다.
문교부의 정보 연락을 받은 국립 박물관의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연구관이 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다음해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삼엄한 전투 지구여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월정사까지 가서 자세한 얘기만 들은 후, 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능한 한 빨리 월정사로 옮겨다 놓도록 당부하고는 일단 돌아왔다. 그 후 동종이 계획대로 무사히 월정사로 옮겨져 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홍직(李弘稙; 1909∼1970) 연구관과 함께 두 번째로 오대산을 찾아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정초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기적의 새로운 국보급 신라 종을 보았다. ‘상원사 동종’ 및 ‘성덕대왕 신종’과 양식을 같이하는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 종으로서 종 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 있었다. 입체적으로 사진도 찍고 종소리도 한 번 울려 보았다. 맑고 신비스런 신라의 음향이 오대산의 자운을 흔들었다.
[1997년 복원한 선림원 종]
임진왜란 같은 때 왜병이 약탈에서 종을 보호하려고 중들이 땅 속 깊이 묻어 감추었던 것일까? 현장 조사에서 출토지 근처가 선림사 터란 것만 밝혀졌을 뿐 수수께끼의 동종이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했으니 기적이었다. 한데, 누가 예측했을까?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땅속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지 겨우 3년 만에 이 제3의 국보급 신라 종은 누구도 보호 대책을 쓰지 않아 무참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비운의 신라 종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 박물관에선 해방 후 처음인 국보 특별전이 열렸다. 개인 소장품들도 거의 출품됐다. 그 중에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의 소장이었던 당시 국보 413호의 ‘청화백자 진사도문 재접’도 포함돼 있었다. 해방 전까지 나이토라는 일본인이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 창랑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을 국보 특별전에 출품하고 있었다.
안으로 큼직하고 탐스런 복숭아 셋을 꽃처럼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 가느다란 잎사귀를 장식적으로 그려 넣은 호화롭고 귀족적인 대접으로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되었던 걸작 조선자기였다. 전시 기간이 끝나자 이 대접은 노량진에 있던 창랑의 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3년간의 전란 끝에 휴전이 성립되고, 국보들의 안전 여부가 확인될 때였다. 창랑의 별장에선 “동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는 대답이었다. 확인한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청랑의 국보 대접은 그 후 ‘동란 중 소실’로 국보 목록에서 자동 삭제되었지만, 이렇다 할 해명자도 없이 ‘행방불명’으로 처리되다가 1962년의 문화재 재지정 때에 와서야 국보 해제가 된 도자기가 또 하나 있다. 역시 한국전쟁 직전의 국보 특별전에 나왔던 물건이었다.
당시 소장자는 장 아무개였다. 미 군정 말기에 수량과 내막을 알 수 없는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시키고 자신도 일본에 건너가 살다가 죽은 골동상인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들의 소장품이었던 문화재를 가장 많이 독점해 갖고 있었다는 장 아무개는 전에 아가와라는 일본인이 소장했던 지정 보물인 고려자기 ‘철채백화 당초문 매병’을 어느 새 입수하고 있었다.
국보 특별전을 기획하며 과거의 지정 문화재들의 행방을 찾던 국립 박물관의 관계 직원이 그 고려자기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아 다행히 장 아무개의 소유가 되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거처를 수소문해보니, 그는 일본에 건너가 있고 물건만 박태식(뒤에 H증권 사장)이란 사람에게 잡혀져 있었다. 박 씨는 그 때 돈 5백만 환을 장 아무개에게 빌려주고 그 담보로 도자기와 불상 등 약 50점의 고미술품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국보 고려자기(해방 후의 지정 번호는 국보 372호)가 들어 있었다.
박 씨는 장 아무개의 측의 허락을 받고 그 국보 고려자기를 국립 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했고, 전시 기간이 끝난 후 장 아무개 측은 박 씨에게 담보로 잡혔던 물건들을 도로 찾아버렸다(박태식의 증언).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보 ‘철재백화 당초문 매병’은 영원히 사라졌다. 장 아무개가 다른 물건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시켰다는 유력한 설이 있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혐의자는 일본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국보 고려자기의 행방엔 일언반구의 증언도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죽었다. 조국애나 민족의식이라곤 추호도 없던 골동상인이었다.
8.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부주의로 파괴되었다는 2점의 국보 고려자기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당시 소장자의 해명이 애매하여 ‘행방불명’으로 여겨져 있고, 또 하나는 조각난 것이 확인되었으나 한국전쟁 후의 처리 여부가 불분명한 채로 세상에서 아주 잊혀 져 있다. 해방 직전에 광산왕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이 일본인 소장자 이도로부터 사 가졌던 ‘청자상감 보상화문 대접’과 ‘보주문 합자’이다.
해방 후 과거의 지정 보물을, 소재지나 건재 여부도 정확히 조사함이 없이 국보 명칭으로 모두 재지정할 때 국보 371호의 번호가 붙여졌던 물건으로서 과거의 소장자가 밝힌 바로는 대접을 3만 원에, 그리고 합자를 2만 원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국보 고려자기 입수 사실은 해방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당국이 확인하고 있지 못했다. 국보 소재지의 변동 신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전후로 무질서한 사회상이었다. 최창학 뿐 아니라 8·15로 인한 국보 유전 시기를 틈타 그것들을 입수해 가졌던 골동상인이나 돈 있는 수집가 가운데 그 사실을 당국에 자진해서 신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보 특별전이 기획됐다. 최창학이 과거에 이도가 가졌던 국보 고려자기 2점을 입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장가 사회에서 확인한 국립 박물관의 최순우 연구관이 출품을 부탁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해명이었다.
“내가 입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15 직전, 시골에 소개돼 갔다가 돌아와서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하여 모두 깨졌다. 그래서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섯 조각이 난 청자대접의 조각을 내보였다. 그러나 합자는 그 때 아주 바스러졌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명이었다. 아무리 바스러졌기로서니 물건이 지정된 보물이었는데 뒤에라도 관계 당국자나 박물관 전문가에게 확인도 안 시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을까? 확실히 다섯 조각이 났던 대접은 잘 붙여 수리한다면 원형만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들조차 한국전쟁과 소장자의 타계로 영영 증발하고 말았다.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합자와 능히 복원할 수 있었던 깨진 대접 조각들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국보 불상 한 쌍의 수수께끼이다. 동란 직전인 5월에 국보 특별전을 끝낸 국립 박물관의 김재원(金載元; 1909∼1990) 관장과 김원룡(金元龍; 1922∼1993)·최순우 연구관 일행이 광주 조선대학의 특별 초청으로 한국의 고미술에 관한 강연을 하러 내려갔다. 강연 일정을 마친 일행은 광주 일원의 문화재와 유적을 살피게 되었다. 그들은 무등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에 전해 오던 당시 국보 211호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과 212호의 ‘금동 보살 입상’을 보러 찾아갔다. 그런데, 절에 이르러 주지에게 들으니,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몰이 심하여 작은 국보 불상들은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관장 일행은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국보가 옮겨진 사실과 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서장은 안전한 금고 속에 귀중히 모셔 두었던 두 불상을 내보이며 ‘부득이한 보호 조치’라고 설명했다. 사실 거기까진 참으로 잘한 국보 보호의 잠정적 대책이었다. 그러나 1933년에 증심사 5층 석탑 속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이 두 국보 신라 불(높이 15cm 내외)은 그 때 국립 박물관의 김 관장 일행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비극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장은 위급한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금고 속의 국보 불상엔 신경을 못 썼고, 그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휴전 후, 서울에서 관계 전문가가 현지에 내려가 보았으나 두 국보 불상의 행방을 알거나 증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경찰서장도 여럿이 바뀌고 있었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가져갔던 경찰서장의 변명은 의심하자면 충분히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정세가 급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아주 귀중하게 금고 속에 모셔 보호하고 있던 작은 국보 불상 2개쯤 살릴 수 없이 버리고 떠났을까?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증심사 국보 불상의 행방불명은 어떤 책임 추궁도 없이 기정사실로 돼버렸고, 10년 후의 국보 재지정 때에 가서는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휴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지만 강원도 간성의 건봉사는 한국전쟁 전까지는 38선 이북이었다. 이곳에 일제 때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지금니화엄경’ 권46과 정호 2년명(고려 고종 1년; 1214)의 ‘동제은상감향로’가 보존 돼 있었다. 해방 후 서류상의 국보 412호와 419호였다. 이 두 국보도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화엄경은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졌고, 향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서 외금강 신계사의 유물 수집소로 이전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전쟁 당시의 주지로부터 들었다는 어떤 증언자의 말을 빌리면, 향로도 한국전쟁 때까지 그대로 건봉사에 보관돼 있었고, 절이 온통 불탈 때 누군가가 밖으로 굴려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얘기인지 이 또한 믿기 어렵다.
한국전쟁 당시 국보 276호였던 진주의 유서 깊은 촉석루가 원인 모를 폭탄에 맞아 완전히 불타버린 것은 유엔군이 진주를 점거했던 공산군을 격퇴시킨 지 20일 후인 195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공중에서 느닷없이 낙하해 온 폭탄 하나가 촉석루 지붕 한복판에 직통으로 맞아 작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중했던 2층 누각의 고건축물은 화염 속에 사라져 갔다. 돌발적인 참사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 당했던 공산군의 박격 포탄이었을까?
[새로 복원한 진주 촉석루]
현재의 건물은 1959년 진주 시민들이 복원한 것으로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진주의 전설적인 명승지인 남강의 절벽 위에 위치하는 촉석루는 역사가 밝혀주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왜장 게다니를 끼고 남강 물로 떨어져 죽은 조국의 상징적 명소이다. 진주 시민들은 과거의 국보 건축물을 재현시키는 동시에 논개의 구국 정신을 길이 살리는 명소를 되 꾸민 것이다.
촉석루가 불탈 때, 경북 안동에서는 국보 302호로 지정 보호되던 문묘 대성전에 직격탄이 명중하여 박살이 났다. 이 대성전 건물은 전북 장수의 향교 건물과 함께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 문화재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2년 후인 1955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였다. 전남 승주군에 위치하는 명찰인 송광사의 여러 국보 건축물 중 백운당과 청운당이 그동안 절을 점령하고 있던 빨치산들의 방화로 깡그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국보 404호로 지정돼 있던 건물이었다.
불길은 대웅전에서부터 치솟았다. 이어서 백운당과 청운당으로 번지면서 송광사 경내는 순식간에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산 밑 마을로 쫓겨 가있던 3명의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그 엄청난 불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 스님이 마을로 다시 뛰어 내려가서 사람들을 동원시켰을 때는 이미 대웅전과 국보 건물인 백운당·청운당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스님들은 다른 국보 건물인 국사당(현재 국보 56호)과 하사당(현재 보물 263호)만은 살릴 수 있었다. 그 때 화재를 면한 약사전도 지금도 보물 302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말엽에 창건된 국내 최대 명찰의 하나인 송광사는 지금도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절로서 유명하다. 빨치산 점령 하의 최악의 수난과 화재 때 국보 건물 두 채와 많은 부속 건물을 잃긴 했으나 스님들은 나머지 국보와 기타 유물들을 잘 보호했다. 현재 이 절엔 건물 아닌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로 10점의 국보와 보물이 간직돼 있다.
같은 전남 지역인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불타 없어진 것도 한국전쟁 중의 참화였다. 2층 팔작지붕에 속속들이 웅건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던 조선 초기(추정)의 이 대웅전 건물은 당시 국보 240호로 지정돼 있었다. 여기서도 국보 건물의 대웅전은 잃었으나 나머지 국보 석탑과 부도 및 탑비엔 큰 피해가 없었다.
곡성군 관음사의 국보 건물이었던 원통전의 경우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에 빨치산들이 불 질러 타버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작고한 고건축 전문가 임천(林泉; 1908∼1965)은 일제 때(1930년 전후)에 실화로 불탔다고 증언한 적이 있어 확실한 내막을 알 수 없으나 해방 후에도 국보 273호로 지정 문화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관음사는 또 국보 214호의 ‘금동 관세음보살 좌상’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원통전이 불탈 때였는지 아니면 한국전쟁 때의 어떤 수난으로였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깨져 국보의 면모를 상실했고, 지금은 목록에서 삭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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