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6) /
일제 패망 후의 적산 문화재(敵産文化財)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는 드디어 패망하고 한국의 그들에게 36년간이나 강점당했던 국토를 되찾았다. 감격스런 조국의 광복, 민족의 해방, 그동안 이 땅에서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군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히자 당장 기가 꺾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겁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했고, 온갖 추태로 과거를 사죄하려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 판국에도 귀한 물건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치밀하게 움직인 자도 많았다. 그들의 귀한 물건이란 금붙이 패물과 이 땅에서 약탈 혹은 수집해 가지고 있던 역사 유물과 미술품들이었다.
9월 들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 와서 일제 조선 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서 미 군정장관에 취임한 아치발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고리짝 2개씩 허용한다고 1차 군정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불상이라든지 고려자기 같은 것들은 꽤 숨겨 갖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처음의 군정령은 “륙색 1개 이상 안 된다.”로 변경되었고, 미술품 수장자와 골동상이었던 일본인들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여 현품과 함께 덕수궁미술관과 전의 총독부박물관(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갖다 바치고 떠나는 사람이 나타났는가 하면, 끝까지 물건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들은 평소 친했던 한국인 친구에게 뒷날 적당한 시기까지 물건을 맡아 보관해 달라고 교섭하거나 싼 값으로라도 모두 처분하려 들었다.
한편 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한 김재원(金載元; 1909∼1990) 박사는 미군의 협조로 과거에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미술품과 기타 모든 한국 유물들을 적산 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산동에 있는, 전에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 창고 속에 각종 미술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정보가 박물관에 들어왔다. 김 박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보 그대로였다. 술장사로 큰 부자였던 사이토의 수집품이었는가 본데 그는 그것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지 창고 속에 모두 모아놓고는 그대로 급히 일본으로 떠난 것 같았다.
김 박사는 일단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분량의 물건들을 박물관으로 운반 운반하려던 트럭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날 즉각 운반 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며칠 후 다시 남산동을 찾아갔을 때엔 누군가가 깨끗이 실어내 가고 창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불법적인 반출자는 사이토의 컬렉션 내막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어떤 약삭빠른 한국인 골동상인이었거나 그와 손을 잡은 폭력배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자가 누구였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해방 직후 무법의 혼란기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부여 규암리 금동 관음보살 입상] 국보 293호(보물 195호에서 승격)
남산동의 적산 문화재 접수엔 실패했지만 그 대신 김 박사는 수집가와 연구들 사이에서 보통 ‘니와세 불상’으로 통하고 있던 유명한 백제불인 ‘금동 관음보살 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높이 21.4cm)을 입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1907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 사람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이미 서울에 정착해 있던 니와세 하쿠쇼(庭瀨博章)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었던 한 쌍의 완전한 걸작 백제 불상 중의 하나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 군정청으로 박물관장직을 위촉받았던 김재원 박사에게 ‘니와세 불상’의 소장처를 알려준 사람은 총독부박물관 때의 책임자였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교수였다. 그는 별안간 박물관을 인수하게 된 한국인들에게 박물관 유물과 기타 내막을 상세히 파악하게 해주기 위해 약 1년간 귀국을 보류하고 있었다.
아리미쓰의 정보 제공으로 김재원 관장은 아직 일본으로 떠나지 않고 있는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이 다 아는 그 백제 불상은 일본에 갖고 가지 못할 테니 다른 생각 말고 박물관에 보내라.”고 넌지시 찔러보았다. 그랬더니 대답이 꽤 당당했다. “나도 많은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니 그 액수의 돈을 갖고 오라.”는 배짱이었다. 그것도 “현찰을 갖고 오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틸 듯이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 관장은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안 되어 지프를 타고 출동했던 미군 헌병이 그 백제 불상을 들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현재 보물 195호, 국립 중앙박물관(국보 293호로 승격되어 국립 부여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해방 직후의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부산·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돈 많은 일본인 수장가, 가령 대구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나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같은 악명 높은 수집가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독점하고 있던 부지기수의 한국 문화재들 가운데 알짜들은 모두 묶어 갖고 밀선을 이용하여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다. 이치다는 서울에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 헌병의 협력으로 일본으로의 출발 직전에 극적으로 압수할 수 있었던 이른바 ‘니와세 불상’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던 또 하나의 보물급 백제 불상을 갖고 있었다. 1922년 니와세에게서 양도받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하나를 붙잡은 김 관장은 마땅히 대구 것도 속히 손을 써서 접수해 다시 짝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미군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어 이치다는 벌써 문제의 백제불상은 물론, 모든 알짜 수장품을 몽땅 꾸려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친 뒤였다. 결국 그 백제 불상은 영영 놓치고 말았다. 믿을 만한 후일담을 빌리면, 호놀룰루 미술관이 일본에서 그것을 사 가려고 애썼으나 끝내 못 사고, 이치다도 그 뒤 노령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이 다 알던 악질적인 일본인 수장가는 끝까지 악질적이었다. 그들은 이제 때에도 말기에도 총독부의 승인 없이 이 땅의 중요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할 수 없었건만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면서 쫓겨 가는 마당에서도 한 가닥 속죄심의 표시는커녕 그들의 수장품을 거의 모조리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다. 그것은 최대의 마지막 악질 행위였다.
공주의 송산리 백제 고분을 깨끗이 도굴해 먹은 가루베의 경우도 앞의 ‘백제 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항목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도쿄의 미 극동 사령부에까지 협조를 의뢰하여 미군 헌병으로 하여금 일본의 어느 시골로 돌아가 있는 그를 찾아가, 한국에서의 수장품들을 어찌 했느냐고 추궁케 했었으나 “현지엔 모두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불법 반출을 부인하더라는 통보가 서울의 미 군정청을 통해 박물관에 전달됐을 뿐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른바 조선총독부 시정 기념관 주임으로 있던 가토 간가쿠(加藤灌覺)의 경우가 있다. 가토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를 빙자하여 소련 스파이로서 1905년엔 경북 팔공산의 동화사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총독부 관리로 오래 있다가 시정 기념관 주임이라는 중요한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인데, 그땐 나이도 많았던 탓이었겠지만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보자 그렇게도 하루아침에 표변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가토가 경복궁의 박물관으로 김재원 관장을 찾아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면서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박물관 어디에라도 써주십시오. 일본인 망하고 조선이 독립한 것은 정말 잘 된 것입니다. 저는 조선에 그대로 살겠습니다. 저의 아내는 조선 여성입니다. 일본의 침략 정치 때엔 조선인들에게 일본 이름으로 창씨를 강요했습니다만 이번엔 제가 조선 이름으로 창씨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저를 이관각으로 불러주십시오.”
참으로 흉물스런 표변이었다. 그의 부인은 사실 한국 여성이었고 그녀의 성이 이 씨였다. 그리고 그는 과연 부인의 이 씨 성을 따른 ‘이관각’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내내 서울에 숨어 있었고, 나중엔 세검동 밖으로 나가 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거기서 죽었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서의 연명의 수단으로 진귀한 ‘은제탑’을 유력한 미군 장교에게 선물했더라는 얘기도 있었고, 또 숱한 미술품과 기타 골동품들을 내다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그 물건들은 가토가 한국에 계속 눌러 산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던 일본인 친구들이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을 부탁한다고 맡겨두고 간 것들이었다.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국보 107호
현재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107호의 조선백자 ‘철사포도문항아리’의 8·15 전의 수장자는 1916년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뒤에 조선철도주식회사 전무가 되었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었다. 앞의 항아리 외에도 그는 상당수의 도자기를 수집해 갖고 있었다. 드디어 일제의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쫓겨 가게 되자, 그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그 ‘철사포도문항아리’만은 숨겨 갖고 가려고 하였다. 높이 53.3cm의 당당한 크기인 데다 철사의 포도덩굴이 멋지게 그려진 최대의 걸작이었기 때문에 만일 무사히만 갖고 갈 수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거액의 신용수표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의 처음 군정령이 한 사람 앞에 고리짝 두 개까지 허가한다고 했을 때 시미즈는 ‘그렇다면 갖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치밀한 은닉 수단을 강구했다. 그는 한지를 한 아름 사오게 해서는 항아리의 안팎을 겹겹으로 싸 발라 깨지지 않게 한 후 누가 봐도 귀중한 조선백자 항아리라고는 도저히 깨닫지 못할 만큼 위장시켰다.
그러나 처음 군정령이 다시 바뀌어 륙색 한 개로 대폭 통제되자 그의 치밀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한국인 친구를 찾아가서 특히 그 백자항아리를 적당한 시기까지 잘 좀 보호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의 모든 수장품을 맡겼다.
시즈미가 일본으로 떠난 지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일제 때부터 골동품 중개인이었던 조 아무개란 사람이 큰 물건 하나를 잡았는데, 바로 시미즈가 한국인 친구에게 보관을 부탁하고 간 ‘철사포도문항아리’였다. 그것을 골동가로 들고 나와 판 청년은 다름 아닌 보관자의 아들이었다.
항아리가 골동가에 나왔을 때 조 아무개는 당장 큰 물건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돈을 마련하여 그것을 붙잡아놓고는 같은 골동가의 중개인으로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유 모·한 모를 통해 고미술품 수집가이며 당시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張澤相; 1893~1969)에게 가지고 갔다. 물론 상당한 액수를 불렀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불의의 병고로 죽었다(수집가 선우인순의 증언).
결국 장택상 컬렉션에 들어간 국보급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시흥 별장에 애장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물건을 보고 몹시 반했던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당시 이화여대 총장)가 그 때 돈 1,550만 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국보 지정이 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청자 ‘순화 4년’명 항아리] 보물 237호
지금 이화여대박물관은 앞의 국보 백자항아리 말고도 보물 237호로 지정되어 있는 높이 35cm의 청자항아리를 갖고 있는데, 고려 초기인 ‘순화 4년’(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관명의 굽 밑에 새겨져 있어 과거의 조선총독부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됐던 물건이다. 해방 전까지의 소장자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잠사회사의 중역이었던 이도라는 사람으로 그는 꽤 안목이 있는 수집가였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다 달았을 때였다. 이도는 지정 보물을 포함한 그 진귀한 수장품들을 빨리 돈과 바꾸어야겠다고 정세를 판단하자 조선인 광산왕으로 미술품 수집가였던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을 찾아가서 모두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최창학은 자기 나름의 기호가 강했다. 그는 아무리 보물로 지정된 물건이라도 색깔과 기형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는 비싼 값에 비해 감상할 가치가 너무 없다고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지정 보물인 고려청자 대접과 그 밖의 아름다운 감상용 도자기들을 일괄해서 사들였다.
해방과 함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가 어떤 경로로 이도의 집에서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을 어디에서 무사히 견디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인에게서 완전히 잊혀 진 유전하던 그 항아리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한 골동가게에 방긋이 나타난 것은 1955년께의 일이었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그 물건의 과거의 내력이나 진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때 우연히 그 가게에 들었다가 ‘국내에서 드디어 나타났구나!’하고 마음속으로 흥분하며 부르는 값을 적당히 지불하고 재빨리 입수한 구안자는 당시 이화여대박물관 창설을 맡고 있던 장규서(蔣奎緖)였다. 그것은 눈의 승부였다. 몇 해 후, 장 씨는 그가 개인 돈으로 샀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를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여보냈다.
8·15 전까지 군산에서 큰 지주로 군림하면서 가나한 농민들을 수탈하여 부와 취미를 마음껏 즐기던 미야자키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시청 근처에 위치하던, 조선인 경영으로는 최대의 골동상이었던 ‘문명상회’ 주인 이 아무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당수의 일품 고려자기와 불상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증언자들의 말을 빌리면 문명상회가 입수했던 물건 가운데 값나가는 알짜들은 대부분 군산으로 보내져 미야자키의 컬렉션 속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 아무개는 미야자키의 그동안의 수장품들을 몽땅 뒤잡아 서울로 올려 왔다. 그 중에 희귀한 ‘오리형 청자연적’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현재 국보 74호로 지정돼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압형수적’과 거의 모양이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약간 다른 특질을 갖는 걸작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소장자는 해주동중학교의 다나카라는 일본인 서무주임이었다. 그것을 1934년에 당시 해주 황해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조선인 수집가 선우인순(鮮于仁筍)이 처음으로 보고 그 때 돈으로 1,600원이란 거액으로 인수했었는데 출토지는 연평도란 얘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도굴품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이 명품 ‘청자오리형연적’은 선우 씨가 애장하다가 사정으로 서울의 문명상회에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이 또한 문명상회의 주인 이 아무개의 손으로 군산의 미야자키에게 넘겨졌었다. 해방과 함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이 ‘청자오리형연적’은 뒤에 손 아무개에게 들어갔고, 지금은 또 다른 수장가에게 넘어가 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돼 있지 않다. 뒤의 수장가는 또 과거에 서울 충무로에서 ‘오사카야’라는 책방을 열고 있던 이토라는 일본인의 수장품이었던 뚜껑이 붙은 흑백상감무늬의 대형 걸작 고려자기 항아리도 여러 다리를 거쳐 입수해 갖고 있다고 고미술상가에선 말하고 있으나 역시 확인돼 있지 않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일본인 수집가들이 급히 처분하려고 허겁지겁 내놓은 미술품들을 계획적으로 긁어모은 사람은 많았다. 장 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마포에 있던 그의 집 창고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한 증언자는 트럭으로 수십 대 분량의 쌓여 있었는데, 내용도 온갖 것이 다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하고, 모든 방법으로 적산 문화재들을 독립적으로 긁어모았던 장 아무개는 미군정 말기까지 서울의 골동상회에서 가장 활발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수완 좋게도 미군 군용기에 상당량의 값진 물건들을 싣고 일본으로 출국했는데 증언자들은 그가 밀선도 이용하여 다른 일본인들의 수장품과 기타 문화재들까지 불법 유출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군을 매수했던 것 같고, 일설엔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에게 유명한 일본도 ‘마사무네’를 바치는 등 대단한 술수를 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 출국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후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당장 그를 잡아오라고 지명 체포령까지 내렸었다는 얘기가 있다. 조국의 해방이나 독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골동상인이었다. 그는 방금 이 땅에서 쫓겨 간 과거의 침략자인 일본으로 자진해서 빠져나간 후 불법 반출해 간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처분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1970년 무렵에 죽었다.
미 군정청에 근무하던 테일러 중령과 과거 일본인 수장가의 얘기도 전해진다. 서울 남산 밑에 상당수의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급히 떠나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 집에 테일러 중령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전의 일본인 집주인이 수집해놓은 도자기와 기타 미술품을 발견하자 견물생심의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그것들을 몽땅 실어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 반출품들을 미국에서 금세 문제가 되어 출처를 추궁 받은 후 외국 재산의 불법 취득 및 반입죄로서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그 때 서울의 미 군정청에도 조회가 왔었다고 한다(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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