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3) /
구한국시대의 서양 외교관들
1971년 6월에 나는 구미 각국의 유수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 문화재와 미술품 내막을 10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 소개했다.
편의상 몇몇 경우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면, 먼저 런던의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수각수로도(水閣壽老圖)’는 윌리엄 앤더슨이라는 영국인이 가져간 것을 1881년에 박물관에서 인수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은입사향로(銀入絲香爐)’(1358년 명) 하나는 인버네언 부인이 갖고 있다가 1945년에 대영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호놀룰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의 목각 동자상과 고려청자 ‘상감연화문(象嵌蓮花文) 주전자’는 1927∼1928년에 개인(미국인)이 기증했다고 카탈로그에 명기돼 있다. 보스턴 미술관에는 1910년대 중엽에 한국에 와서 수집한 찰즈 B. 호이트의 고려자기 컬렉션이 모두 유증돼 있다.
보스턴 미술관은 또 1910년대에 일본인 오쿠라가 입수해 갖고 있다가 미국인 에드워드 J. 흄즈에게 팔아넘긴 신라시대의 걸작 ‘금동 약사여래 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고, 그 외에도 국내에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11세기 고려시대의 ‘은제 도금(銀製鍍金) 주전자’와 ‘승반(承盤)’을 갖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은 1910년대 중엽에 르 브롱드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기증받았고, 덴마크의 국립박물관에는 구한말에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는 신라시대의 청동불 2구와 고려 말의 목불, 그리고 각종 민속자료가 진열돼 있다.
1950년대 후기에, 그전까지의 소장자인 일본인으로부터 신라시대의 금동관(고분 도굴품)을 입수해 갖고 있는 파리의 기메 미술관엔, 1887년에 서울에서 한·프 조약을 체결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한국명 갈임덕)가 1903년까지의 재임 기간 중 서울에서 수집한 고려자기 등이 기증돼 있다. 파리에 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한국 문화재로서 체르뉘스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자그마한 동종은 미술관 창설자인 앙리 체르뉘스키가 1871년에서 1837년까지 중국·일본으로 미술품을 수집을 떠났을 때 일본에서 사간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이 종에는 1311년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독의 쾰른 동양 미술관에 있는 한국 도자기들은 “1910년에 아돌프 피셔가 현지(한국)에서 출토품을 수집한 것을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입수했다.”고 미술관 카탈로그에 소개돼 있다. 또 이곳에 진열돼 있는 고려청자 ‘표형(瓢形) 주전자’는 1928년에 런던에서 공개된 호브슨의 컬렉션에 들어 있던 물건이다.
이상은 현재 구미 각국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 문화재와 미술품 중 반출 시기와 경위가 확실한 극히 일부의 내용이지만, 그 나머지는 한국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 약탈 혹은 불법적으로 수집한 것들이 일본을 통해 각국으로 팔려 나간 것들이다. 다만 앞에서 몇 사람의 서양인 이름이 언급됐듯이 1883년의 인천 개항 이후 서울에 등장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기술자·정부 고문·선교사·외국어 교사 등 여러 분야의 서양인 가운데 한국의 옛 미술품을 수집한 사람이 더러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역시 제한돼 있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일본인 무법자들처럼 이 땅의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무법의 수집가는 별로 없었다.
1894년에 서울의 프랑스 어 학교 교장으로 초빙돼 왔던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1874~1949)의 회고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한국에 오던 무렵에 고려자기를 수집하고 있던 서양인은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한국명 安運)과 프랑스 공사 플랑시 등이었는데, 플랑시의 수집품들은 현재 파리의 기메 미술관에 보존돼 있다. 그 중에는 내가 그에게 기증한 것도 있다.”(<외국인이 본 조선 외교 비화>, 1934년)
마르텔 자신도 서울에서 약 50년 사는 동안 상당히 안목 있는 수집을 했었는데, 그의 컬렉션이 그 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텔의 회고담=
에밀 마르텔은 자신이 서울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골동 수집을 몹시 좋아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1894년)의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프랑스 공사 플랑시 씨의 집이라든지 미국 공사 알렌 씨 집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를 관상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러한 고려자기의 꽃병이나 항아리·접시·사발 같은 것은 서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어느 골동상에서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 후가 되니까 스스로 구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조선인이 자꾸 팔러 오는 바람에 차차 수집을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주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고 시종 주위를 살피는데 어딘가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즉, 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 당시 가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팔러 오던 측이 골동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마르텔은 도 구한말의 골동 가격을 말하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 속에서 눈부신 것 서너 개를 집어 들고 하나씩 가격을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4개를 모두 사준다면 10원만 받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건 좀 비싸니까 8원으로 하자고 교섭하나 그들은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내일이면 8원으로도 살 사람이 없을 거다, 7원밖엔 못 받을 거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일 가서 보라.’고 말해서 돌려보낸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떠나갔다가 곧장 되돌아와서 ‘그러면 8원으로 하자.’고 한다. 결국 그런 식으로 물건을 팔고 갔다. 나는 당시 값이 너무나 싸기도 했으므로 그렇게 상당수를 수집하였고, 나 외에도 그런 방법으로 산 사람이 상당수 있었던 걸로 안다.”
일본에서 건너온 무법자들이 고려 고분에서 고려자기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가운데에도 어느 덧 도굴한 유물을 외국인에게 들고 가서 몇 푼 받고 팔아넘기는 불쌍한 행상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던 때를 마르텔은 말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
[청주 흥덕사지] 사적 315호
한편, 나중에 도자기류의 수집품을 모두 파리의 기메 미술관에 넣었다는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1903년까지의 재임 기간 중 고서도 적잖이 수집했다. 오랫동안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비장돼 있다가 1970년대 초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 전시회에 처음으로 나와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이라고 크게 뉴스가 되었던 고려의 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년, 청주 흥덕사 간본)은 서울에서의 입수자가 바로 플랑시였다. 그 사실도 1970년대에 와서야 밝혀졌는데 당시 파리의 국립 도서관 동양 도서 책임자인 세귀 여사의 증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내막은 이러하다.
콜랭 플랑시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로 있으면서 수집한 수백 권의 고서를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그는 1930년에 사망했는데, 그 전에 그 한국 고서의 일부를 파리의 동경대학에 기증했고, 나머지는 옛 책과 미술품 경매장이던 드루오 호텔에 내다 경매에 붙여 팔았다. <직지심체요절>은 뒤의 경매품 속에 들어 있었다. 동양 고서 전문가의 평가에 따라 파리 국립 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입수하려고 했을 때엔 이미 그 진본은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베베르는 도서관측의 간곡한 교섭을 받자 “내가 죽은 후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에 약속은 이행 되었다. 1950년, 베베르가 사망하자 <직지심체요절>은 약속대로 파리 국립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플랑시가 <직지심체요절> 같은 귀중본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쿠랑은 1890년부터 1년 반 동안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옛 책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권고에 따라 플랑시 공사는 많은 귀중본을 수집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귀국한 후 프랑스 어로 된 <한국 서지>를 발간했는데, 그 속에 이미 <직지심체요절>이 소개돼 있다. 쿠랑의 <한국 서지>는 1894년부터 1901년까지 4권으로 묶은 한국 고서 목록으로 약 3,821종을 다루고 있다. 뒤에 플랑시가 그의 한국 고서 컬렉션 일부를 파리의 동양대학에 기증했다는 것도 쿠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880년대에 들어와 서울엔 외국 공관이 다투어 등장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반도가 세계로 향해 문이 열릴 때의 급격한 시대적 변화였다. 서양인들은 극동의 작은 ‘은둔의 나라, 조선’(1882년에 미국인 그리피스가 지은 영문 <한국사>의 표제)의 지리·풍속과 역사·문화에 처음으로 접촉하면서 각자 취미 것 이 땅의 전통적인 공예품·미술품 기타 골동품을 수집하였고, 조선 연구를 위해 귀한 책들도 입수해 가졌다. 그 중에서도 교양 있는 서양인들 사이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역시 개성 근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했던 고려자기였던 것 같다. 미국 공사와 프랑스 공사를 위시해서 많은 서양인들이 서울에서 그것을 사 갖고 있었다고 에밀 마르텔은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독점적인 수집 및 매수자는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1902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고건축물과 미술 문화를 조사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의 <한국 건축 조사 보고>(1904년 간행)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도기에 이르러서는 근년에 개성 부근의 고분을 발굴(도굴)하여 그것을 얻는 일이 빈번한데 모두 부장품이다. 그러나 분묘를 파는 것은 나라가 금하는 행위로서 범법자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나는 서울과 개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동포에게서 그와 같은 많은 도기를 보았다. 야마요시 씨도 전에 주한 일본 공사관에 근무할 때에 그것을 수집하여 거의 수백 점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도쿄 제실박물관에 방을 하나 얻어 그것들을 진열하고 있다.”
한편,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이른 봄께, 달성군 팔공산 속의 한 절에서 모종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일본인 특무대원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가토, 그는 병을 정양한다는 구실로 신분을 감추고 약 3개월간 절에 머무르면서 특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금당암의 수미단 밑에 이상한 나무궤짝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속을 조사해 보자고 노승들에게 제의했다. 일본인 특무대원의 요청을 노승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는 궤짝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엔 뜻밖에도 커다란 고려청자 항아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뒷날 가토가 일본의 잡지에 밝힌 바로는 그 때의 도자기는 높이가 약 80cm에 우아한 연화 당초문이 양각돼 있고, 그 굽 밑에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은 태토에 관기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 그 고려자기 항아리는 어느 덧 대구에 거주하는 서양인에게 팔려 나갔고, 그 뒤 다시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더라고 가토는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절에서 그것을 팔았다는 말이 없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하자 절에서는 한때 난리가 났었다는 전문도 있는 것을 보면 가토 자신이 소문을 낸 이후 일본인 무법자들이 그것을 뺏어다가 서양인에게 팔아먹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토가 말하는 대형 고려청자 항아리를 궤짝 속에 전래시키고 있던 절은 현재 대구시 도학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있는 동화사였다. 그는 또 이런 얘기를 적고 있다.
“그와 비슷한 또 하나를 나는 본 적이 있는데 1915년 10월 말에 총독부에서 경남 양산군의 통도사 출장을 명령받았을 때다. 그것은 대종형의 고려청자 향로였는데, 한 선방의 불단 밑에 있던 오랜 궤짝 속에 많은 파경과 함께 들어 있던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하던 당시엔 저 유명한 십불골탑(금강계단을 말한 듯) 좌측에 위치한 작은 불전의 향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까, 오래 전부터 부산에 살고 있던 일본 왕래의 상인(일본인 골동상을 말한 듯)이 오사카에서 만든 커다란 진유향로를 갖고 가서 그것과 바꾼 후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통도사의 희귀한 전세품 고려자기 향로도 결국 일본인 악당이 악랄한 수법으로 탈취해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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