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2) /
백제 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공주 송산리 고분군] 사적 13호
낙동강 하류와 경주 일원에서 가야 고분과 신라 고분이 끊임없이 도굴되고 있을 때, 부여와 공주 지역에서는 또 백제 고분이 같은 수난을 겪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배후의 조종 및 교사자는 수집가를 자처한 돈 있는 일본인 악당과 골동상이었다. 1927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들을 조사한 총독부(고적 조사 보고)에 당시의 도굴 실태가 언급돼 있다.
“1927년 3월께 마을 사람들의 도굴로 제1 호분에서 곡옥·유리옥·철검·도끼 둥의 잔결이 출토됐다는데 현재 그것들은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이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제2 호분에서도 순금 귀고리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 나이치에 있는 아무개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번에 조사한 고분들은 예전에 혹은 최근에 도굴당하고 있어 발견된 부장품은 극히 적었다.”
공주와 부여 일원의 백제 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되기는 1909년에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 일행이 표면상 구한국 탁지부 위촉으로 한반도 전역의 고적 조사를 실시할 때였다. 그들은 1915년의 두 번째 학술 조사 때엔 공주산성 부근에서 백제 고분을 시굴하여 내부 구조도 파악하고 부장품도 꺼냈다. 우아한 문양의 백제 와당이 이때 처음으로 주목되었다. 일본인 골동상과 악질적인 도굴꾼들에겐 모두가 고맙기 짝이 없는 조사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지하 보고에 눈독을 들이고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북쪽에서 배수로 공사가 착수됐을 때 땅속의 약 1.5m 지점에 약 100여 장이 전돌을 쌓아 우물처럼 만든 속에 토기 항아리 하나가 들어 있는 신비로운 백제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 때 재빨리 그 전돌들과 토기 항아리를 가로챈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인 골동상 구라모토였다.
진작부터 공주에 정착하여 백제 유물의 약탈 및 도굴품을 서울과 기타 지역으로 전매하던 구라모토는 측면에 장식적인 문양과 문자가 나타나 있는 전돌들을 불법적으로 독점한 뒤, 서로 긴밀한 일당이었던 서울의 골동상 아미이케 시게타로에게 내밀히 연락을 취했다.
구라모토의 연락을 받은 아마이케는 당장 공주로 달려갔다. 그는 약 100여 장의 전돌 가운데서 장식 문양과 문자가 들어 있는, 곧 값이 많이 나갈 10여 장을 골라잡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그 중의 8장을 즉각 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겼다. 나머지는 당시 서울 남대문로 3가에서 ‘조선 고미술 공예품 진열관’이란 간판을 걸고 있던 대규모의 고미술상 도미다에게 들어갔다.
세키노 박사가 총독부 박물관에 팔린 공주 출토의 진기한 백제 전돌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깜짝 놀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그는 박물관 측으로부터 “서울의 골동상 아마이케에게 샀는데 출토지는 공주란다.”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현지 조사를 떠났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하여 문제의 전돌과 토기를 불법으로 점유했다가 팔아먹은 골동상 구라모토를 찾아 나머지를 보여 달라고 했던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같은 날, 세키노를 한 발짝 앞질러 공주로 달려온 아마이케가 전에 고르고 남겨놓았던 전돌들을 깨진 조각까지도 몽땅 묶어 가버렸던 것이다. 눈치 빠른 골동상의 무법의 매점 행위였다.
어디서나 출토 유물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그것들을 암거래하여 치부하는 자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공주에서는 1920년에 이미 송산리 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가 깡그리 도굴되고 있었다. 그렇듯 고분 속의 모조리 약탈된 후, 5호 고분의 텅 빈 현실에는 당시의 마코라는 일제 담뱃갑 하나가 남겨져 있어 도굴꾼의 여유작작했던 범행을 말해주고 있었다(현장을 목격한 공주 고인의 증언).
1926년 8월에 개최되었던 총독부 고적 조사 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래, 조선에서는 고분은 선조의 영역으로 신성시하였고, 그 부장품과 같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타인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고래로 대죄로 여겼다. 따라서 본부(총독부의)의 학술적 조사 때에도 지방민(현지 주민)의 반감을 초래한 적조차 있었다.”
이 무렵 공주에는 중학교 교사로서 백제 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부장품을 파먹은, 참으로 악질적인 일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 1945년에 일제 패망과 함께 한 트럭 분량의 백제 유물 컬렉션을 갖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백제 미술>, <백제 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 통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지난날의 그의 고분 도굴 사실과 악질적인 유물 수집의 내막을 잊지 못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연전에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그 속에서 수천 점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와 국내외에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소개되었지만 바로 그 앞 왼쪽으로 붙어 있던 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가 바로 가루베였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로써 이미 명백히 입증돼 있다. 공주 시민이 잊지 못할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 당시 같은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 자는 용서할 수 없는 못된 자로서 말해졌을 정도다.”
이는 공주의 여러 증언자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토록 악명 높은 가루베가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924년이었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10여 년 재직했다. 그동안 그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제 유물을 수집 혹은 도굴했다. 그는 백제 문화를 연구한답시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동원했었고, 유적지를 알아 오는 일과 유물 수집을 숙제로 내주는 일조차 있었다 한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부산의 일본인 골동상과 늘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또 교토에서 골동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927년에 송산리 1호 고분에서 도굴된 유물들이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에게 들어가 있다는 당시의 총독부 <고적 조사 보고>의 도굴품 소장자가 가루베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루베 자신은 어떤 글에서도 그의 도굴품에 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으나 불상을 입수했던 일은 약간 밝히고 있다. 공주읍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 여래상’(높이 약 7cm)과 이인면 목동리 부근에서 출토된 ‘동조 보살상’(높이 약 18.2cm), 그리고 부여군 규암면 내리에서 출토된 ‘금동 협시보살상’(높이 약 5.7cm) 등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6호분] 사적 13호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사적 13호
그보다도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의 단독 도굴과 부장품의 독점적인 약탈에서 최고의 악명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5호 고분 바로 옆에 위치하는 6호분을 연도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 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고 공주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제가 도굴해놓고도 그 사실을 공주경찰서에 신고하여 완전 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 공주경찰서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급히 내려갔던 총독부 박물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뒤에 평양박물관 역임)는 뒷날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말이 나 돌았는가 함은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 벌었을 거야.”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논 상답 한 마지기에 70∼80원 할 때 20만 원이라면 그 때 가루베가 도굴해 먹은 송산리 6호분의 유물 내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어림된다. 전문가들은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염두에 두고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루베는 공주에서 강경의 중학교로 전근해 가서 이번엔 호남 일대의 유적을 조사·연구한다고 유물을 수집 혹은 탈취하다가 일제 패망의 8·15 해방을 맞았는데, 그 겨를에도 그는 그의 온갖 불법 행위를 컬렉션을 모조리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8.15 직후, 가루베는 강경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대구로 도망쳤다. 대구에서 같은 악당이었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국립 박물관 공주 분관장으로 취임했던 유시종(劉始鍾) 관장이 미 군정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에게 과거의 컬렉션을 어떻게 했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화신이 “공주박물관에 모두 갖다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었다. 유 관장은 공주 지구 미 군정관과 함께 강경까지 가서 가루베가 살던 집도 뒤져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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