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44) /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과 존 개스비(John Gadsby) 컬렉션
1914년을 전후해서 일본 도쿄에 와서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존 개스비, 당시 25세의 청년이었다. 도쿄에 정착한 지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그는 거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골동상에서 희한하게 아름다운 꽃병 하나를 발견했다. 값을 물으니 500원, 당시 시세로는 호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개스비는 꼭 그것을 입수하고 싶었고, 결국 사고야 말았다. 본시 귀족 가문의 미술품 애호가였던 그는 예리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 때 그가 처음으로 산 것은 일본 도자기로 ‘나베시마 핵회화훼문병’이었는데, 뒷날 일본의 중요 미술품(보물급)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제대로 본 명품이었다. 그는 곧 고려자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서 거기에 완전히 미쳤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세계의 어느 나라의 도자기보다도 훌륭하다.”고 개스비는 감동했다. 이후 그는 서양인으로서 고려자기의 최대의 안목 있는 수집가로 군림하게 되었는데,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안에서의 수집은 물론, 여차하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골동상을 순례하면서 걸작과 일품을 사 모았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국보 66호
[백자 박산형뚜껑 향로] 보물 238호
이런 일화가 전한다. 1930년대 초기의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맞이에 바쁜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개스비가 도쿄에서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달려왔다. 알고 보니 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입수하고 싶다고 서울의 골동상에게 말해 놓았던 일본인 고관 수장의 걸작인 고려시대의 ‘청자상감 유죽연로 원앙문 정병(靑瓷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과 ‘백자 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를 어떤 가격으로라도 사버릴 작정으로 돈을 준비해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와 거래를 하고 있던 골동상은 때가 공교롭게도 섣달 그믐날이어서 난처했지만 개스비의 결의가 하도 비장한 바람에 실례를 무릅쓰고 소장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본인 고관을 움직였던 것인지 개스비는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정월 초하룻날 아침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원했던 두 점의 고려자기를 손에 넣고 도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집념의 성공이었다.
그 때 개스비가 서울의 일본인에게서 거액으로 양도해 간 2점의 고려자기는 그의 다른 고려자기 컬렉션과 함께 몇 해 후에 가서 서울의 민족적인 문화재 수집·보호자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몽땅 인수하게 되지만 보통 진품이 아니었다. 간송이 그것을 인수하자 총독부에선 곧 보물로 지정했었다. 현재는 이 ‘청자상감 유죽연로 원앙문정병’이 국보 66호, ‘백자 박산향로’가 보물 238호로 지정돼 있다.
간송은 1957년에 존 개스비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고도자(古陶瓷), 특히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수집한 사람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대개는 그 수집품이 양이 많은 반면 질이 떨어지고, 질이 우수하면 양이 많지 못하였다. 또 처음에는 수집 열이 대단하였으나 몇 해 지나는 동안에 차차 식어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 영국인 존 개스비 씨는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방대한 수량의 최우수 작품만을 모아놓았으니 당시 고려자기 수집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내외에 떨쳤던 것이다. … 오랜 시일을 두고 투철한 감상안과 열성 있는 수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은 당시의 고미술 수집가, 특히 도자기 수집가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간혹 수집가와 골동상들이 모여서 한담을 할 때면, ‘개인으로 그의 수집품만큼 우수한 고려자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느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그만큼 거대한 수집을 한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라느니 하는 것이었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 ‘고미술 수집 여화’)
1930년대에 중엽에 이르러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그처럼 유명했고, 또 그 내용은 어떤 수집가의 컬렉션보다도 높이 평가됐다. 따라서 그의 집을 출입하는 골동상이 도쿄·서울·부산 등지에 여러 명 있었다. 간송도 한창 수집을 하던 때라 역시 그들과 접촉이 있었다. 간송은 그들에게 “만약 개스비가 그의 고려자기들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 없이 연락해 달라.”고 넌즈시 부탁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정보는 없었다.
간송 전형필은 존 개스비가 언젠가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모두 내 놓아 처분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 때엔 일본 사람이나 기타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즉각 손을 써서 인수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민족적 사명이었다.
과연 간송의 예측은 적중했다. 1937년 2월의 일이었다. 개스비와 가까이 접촉하고 있던 도쿄의 한 골동상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는데, “개스비가 고려자기들을 처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몹시 고대하던 정보였다. 그러나 편지 내용만으로는 미진한 점이 많았다.
“처분한다면 전부냐, 일부냐?” 간송은 그 점을 확실하게 확인해 달라고 도쿄의 정보 제공자에게 지급으로 독촉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정확한 회신이 날아왔다.
“처분 결정은 확실하며,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한다. 중간 알선은 나 한 사람만이 위임받았다. 일단 전보를 칠 터이니, 그 때에 지체 없이 도쿄로 와 달라.”
며칠도 안 돼서 기다렸던 전보가 오고, 간송은 그 즉시 도쿄로 출발했다.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국수적인 반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신과 정부 고위층을 기습, 잔혹한 살상을 감행한 저 유명한 2·26 사건의 꼭 1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도쿄 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골동상이 마중 나와 있었다. 급히 여관으로 직행한 간송은 비로소 개스비가 왜 그의 소중한 컬렉션을 전부 처분하려 하고 있는 지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년 전 바로 오늘 발생한 2·26 사건을 보고 개스비 씨는 즉각적으로 일본이 머지않아 미·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급히 중요한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골동상의 말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변화였다. 사실 2·26 사건 이후 일본에선 군부의 정치 지배력이 무섭게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스비가 예측했던 그대로 몇 달 후 먼저 중일전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간송은 중간 골동상의 안내를 받으며 도쿄 고지마치에 호화 저택을 갖고 있던 존 개스비를 방문했다. 그 때의 인상과 개스비에게서의 극적인 고려자기 인수의 감회를 간송은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밝은 아침 햇볕이 유리창으로 따뜻이 비치는 2층 응접실에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푸른 비취빛이 줄줄 흐르는 향로, 매병과 알토란같이 모아놓은 향합·유호를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단정한 옷차림을 한 주인 개스비 씨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빈틈없는 정장을 한 집사가 엄숙히 시립하고 있었다. 알선인이 ‘어제 서울에서 오신 전 선생이십니다.’하고 소개를 하니,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아아, 그러세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하며 반가워하였다. 그 날 저녁에 비로소 들으니, 알선인은 그 때까지 매수인이 누구인 것을 밝히지 않고,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그도 알선인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터이므로 어련하겠느냐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도쿄나 오사카의 저명한 수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뜻밖에 한국 청년(당시 간송은 31세였다.)이 나타나서 의외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도 전부터 한국의 고미술품 수집가로서의 나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뿐 아니라 항상 한국의 그 훌륭한 고미술품들이 한일합방 이후 수십 년 동안을 통째로 일본인 손아귀 속에서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 수집가가 차차 생겨서 열심히 수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 때에 내가 나타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 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그 때 간송이 지금 돈으로 치면 아마 수억 원대에 가까웠을 지도 모를 거액의 사재를 아낌없이 지불하고 존 개스비의 알짜 고려자기 컬렉션을 몽땅 인수하여 국내에 되가져 온 용단은 보통 위대하고 용기 있는 민족의식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개스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만일 간송이 평소 예의 주목하고 있다가 즉각 달려가지 않았던들 그것은 일본 안의 재벌 수집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컬렉션이었다. 또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 고려자기를 그 때 영영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국보 65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 국보 74호
이미 언급한 국보 ‘청자상감연로원앙문정병’과 보물 ‘백자박산향로’ 외에도 그 때 도쿄의 영국인 개스비에게서 극적으로 인수, 국내로 되가져다가 보호한 고려자기 가운데 현재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는데, ‘청자 기린 유개 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국보 65호), ‘청자 오리형 수적[靑磁鴨形水滴]’(국보 74호) 등이 그것이다. 보물 241호의 ‘청화백자 철사진사 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도 그 때 개스비의 컬렉션에 들어 있었던 물건인 것 같다.
그렇듯 국보급이 5∼6점이나 포함돼 있던 개스비의 컬렉션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사오기 위해 간송은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있던 공주 지방의 농장을 급히 처분해야 했다고 한다. 그 때 개스비는 전쟁이 임박하고 있는 불안한 국제 정세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컬렉션을 내놓게 되었으나 근 30년간 최대의 사랑과 안목으로 수집하였던 한국의 도자기들과의 석별을 아쉬워하면서 고려청자의 ‘양각 모란문 잔(陽刻牡丹紋盞)’ 하나와 ‘향합(香盒)’ 하나를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짐(인수한 고려자기)을 싸는 동안 그는 나를 오랜 친구와 같이 친절해 대접해주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아무쪼록 그 훌륭한 귀국의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의 서재나 응접실을 보아도 송청자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조선백자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귀하는 구주나 일본의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고려자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매우 떨어지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다.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 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구말구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흐르는 듯하였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 ‘존 개스비 씨 이야기’, 1957년)
존 개스비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간송에게 모두 도로 내준 후에도 한 1년 동안 도쿄에 머물러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서울로 운반된 개스비의 컬렉션은 1936년 간송의 개인 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 생명의 보존처로서 세운 성북동 숲속의 보화각(葆華閣; 간송 미술관)에 들어간 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호되고 있다. 간송은 또 생전에 그 도자기들을 매만질 적마다 개스비를 생각하곤 했다. <존 개스비 씨 이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맺고 있다.
“그가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면 때때로 고려자기를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가 아직 생존해 있어서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다행히 전화를 면한 그의 애장했던 고려자기를 보여주고 싶다. 말없는 자기들도 뜻이 있으면 반겨하리라.”
고려자기를 매체로 한 한국의 간송과 영국인 개스비의 이 일화는 과거 일제 밑에서 도국과 불법적인 독점만 일삼던 부지기수의 일본인 수집가들을 상기할 때 정말 고려자기처럼 깊고 파란 빛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정당한 입장에서 서로 팔고 산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 수집가와의 사이엔 그런 우정도 있는 일화가 하나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은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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