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34) / 4대 사고의 기구한 종말

문근영 2017. 3. 1. 10:47

<한국 문화재 수난사>(34) /

4대 사고의 기구한 종말



[평창 오대산 사고] 사적 37호




[봉화 태백산 사고지] 사적 348호





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의 역대 장서는 서울의 규장각본 외에도 한일합방 당시까지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 네 곳에 소개되어 엄중히 보관돼 있던 엄청난 분량의 사고본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후 창덕궁에 연금 당하게 된 이왕기가 총독부로부터 기증이라는 모멸스런 형식으로 인수한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赤裳山城 史庫本)’은 별도로 치고, 강화도의 정족산성 사고본(鼎足山城 史庫本)’과 강원도 오대산 사고본(五臺山 史庫本)’, 그리고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본(太白山 史庫本)’이 그것이었다. 이 지방 4대 사고에는 가장 귀중한 <이조실록(李朝實錄)>이 각각 1질씩 간직돼 있었다.


정족산과 태백산의 사고본들이 통감부 때부터 이미 서울로 운반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종친부 건물의 임시 규장각 분실에 전부 모여진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01912년의 일이었다. 정족산 사고본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하여 관청리의 동종(보물 11)을 약탈해 가려고 했던 프랑스 함대의 수병들에 의해 이미 상당수가 탈취됐었다고 하나(이홍직 편, <국사대사전>) 1937년에 경기도가 조사·편찬한 <경기 지방의 명승고적>(일문)에는 그런 설명을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있다.


삼랑성(정족산) 안의 사고는 건립(1660) 이래 완전히 보호되어 왔다. 프랑스 병사들의 내습도 동문 밖에서 격퇴되었기 때문에 약탈당할 틈이 없었고,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 것은 강화 읍내에 있었던 규장외각의 장서들이었다.”


여하간 <이조실록>같은 귀중본만은 잘 보조시켰던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그런대로 수습이 잘 되어 규장각 장서들과 함께 전체가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가 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돼 있지만, 총독부가 저들 마음대로 본국의 동경제국대학 부설 도서관에 실어 보내 식민지 연구 자료로 삼게 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0년 후에 가서 기구한 종말을 고했다. 오대산 사고본이 총독부의 양도로 몽땅 동경제국대학으로 실려 간 것은 19143월의 일이었다. 총독부는 사고의 보호를 맡고 있던 월정사의 인근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동해안의 주문진 선착장까지 등짐과 달구지로 운반한 뒤 배로 실어 갔다. 그 때의 상황이 <월정사 사적기(月精寺史蹟記)> 끝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1433,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桶口)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趙秉璇)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 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반출돼 간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벌을 포함한 사책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합방 선물로서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에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 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책은 교수들이 밖으로 대출해 갔던 20여 책에 불과했다.


다른 사고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오대산 사고도 내부의 장서를 몽땅 일제에게 빼앗긴 뒤로 빈 건물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가 그조차 주저앉아 없어지고 지금은 겨우 그 터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만, 가장 귀중한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유서 깊은 곳이어서 사적 37호로 지정돼 있다. 다른 사고들 역시 한 채의 건물도 보호되지 못했다. 무주 적상산성 사고의 경우는 산성 안의 수호사였던 안국사(安國寺)에서 사고 건물 하나를 헐어다가 명부전을 삼고 있으나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또 언제 그렇게 뜯어 옮겨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적성지(赤城誌)>에는 <이조실록>을 보장하던 선원각(璿源閣)6, 그 외 사고 12칸과 수사당(守史堂) 6칸이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장서가 이왕가의 장서각으로 옮겨져 가던 한일합방 직후까지는 그 건물들이 모두 건재했었음을 당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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