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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25) /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 당한 유점사 53불(楡岾寺 五十三佛)

문근영 2017. 2. 14. 08:42

<한국 문화재 수난사>(25) /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 당한 유점사 53불(楡岾寺 五十三佛)



금강산 유점사 전경


유점사 능인보전


유점사 53불


1912, 금강산 지역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와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는 내금강께의 유점사에서 신라시대의 ‘53불 신앙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 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그들이 발견하고 조사한 유점사 53불 중의 유존상들을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 고적 도보>(총독부 간행) 5책과 제7책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때의 학술적인 조사·평가와 사진은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을 약탈거리의 정보였다.


19163,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운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강산 유점사로 침입해 갔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본전인 능인보전(能仁寶殿)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 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백주의 약탈이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사승이나 누군가를 위협하느라고 권력 신분을 가장하여 개성에서 왔다고 큰소리를 쳐 결국 자기 노출의 실수를 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에서 불상 도난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경찰)가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뿐이었다.


무력했던 중들은 9점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그 이상 문제 삼지 못했다. 또 그 불상들의 조형적인 양식이나 세부적인 형태에 평소 아무런 지식도 관찰도 없었던 중들은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도난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 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원위치 불명의 보잘 것 없는 수상들이란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범인을 추적했던 일본인 순사는 개성에서 쉽게 그들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에게 매수되어 악질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들이 어디서 또 약탈해 갖고 있었던 듯한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훔쳐온 것 중에서 조각 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 음모는 완전히 성공했다. 돌아온 9점의 불상조차도 3분의 2가 형편없는 것으로 바꿔치기 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중은 그 때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 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신라 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 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 약사여래 입상은 그 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 고적 도보>에 사진과 조사 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 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유점사 53불 해설>, 황수영 편, 1967).


한편 19353월에 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와 사와 슌이치(澤俊一)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 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의 조사 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사실은 전의 고적 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宋滿空; 1871~1946) 선사 등이 발의하여 당시 경성 미술품 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 여래상과 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15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져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앞의 <유점사 53불 해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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