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21) /
중흥산성(中興山城)에서 해체된 걸작 쌍사자 석등(雙獅子石燈)
일제 밑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 혹은 불법 반출한 석탑·석등·부도의 수효와 그 만행의 형태, 그리고 그것들의 행방을 낱낱이 조사·집계한 자료는 아직 없다. 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탑·석등·부도가 인천·부산·군산·목포 기타 여러 항구에서 일본 본토로 실려 나갔지만 1966년의 ‘한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따른 협정’ 후의 반환 문화재 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 개인 소유로 돼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는 그것들을 제외시켰다.
일제 때 얼마나 많은 석탑류가 일본에 유출되었는가를 알려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데, 그 하나는 1930년대에 오사카에서 주기적으로 경매가 벌여졌을 때의 목록들이다. 그것을 보면 한 번 경매 때 보통 50∼60점의 조선 석탑·석등·부도가 모여지고 있다. 8·15 직전까지 도쿄의 어느 백화점 아래층에는 일본인 골동상과 공모하여 이 땅의 문화재 반출과 판매에 성공한 이 아무개란 반역적인 조선인 골동상이 각종 석물을 즐비하게 진열해놓고 일본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현재 국내에서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물 가운데에도 앞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수난의 내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 한 예로 국보 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 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게 돼 있던 것을 총독부가 용케 중간에서 접수하여 서울의 박물관으로 운반해 온 것이다. 그 정확한 내막이 1932년 5월에 총독부 고적 조사과 기수였던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가 작성한 현지 조사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전남·북 지방에서 석탑·석등 등이 매매되어 부잣집 마당에 놓이고, 혹은 바다를 건거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됨이 심하고, 천여 년을 유존한 국보적 고탑을 넘어뜨리고 파괴하여 내부에 수장하고 있던 유보를 훔쳐 팔아먹는 자가 있다는 풍문을 가끔 들었었고, 그런 유물로 믿어지는 것을 수삼 차 본 일도 있음. 작년 가을에 대구에 사는 이치다가 어느 시골에서 석탑과 석등을 산 후, 대구로 운반해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어서 소재지와 매매의 이유를 물으니,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보통학교 후원회가 기금 자산을 만들 목적으로 중흥산성 내에 있는 3층 석탑과 석등을 매각했다. 시골 산중에 고대의 유물을 두었댔자 보호가 되지 않는다. 대구로 이전하여 마당 안에 두고 싶다는 희망이었음. 3월 17일. 광주에서 도지사 관사 마당에 옮겨져 있는 석등을 보았음. 지금까지 3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일품임. 3월 20일 밤에 옥룡 경찰관 주재소를 찾아 중흥산성 내의 폐탑 매매의 건을 들었음.”
“소화 5년(1930년) 8월께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기본금 조성을 위해 산성 안의 석탑 및 석등의 매각처를 변정섭이라는 자에게 의뢰했음. 변은 부산에 있는 성명 미상의 매수인 2명을 동반하고 와서 물건을 보게 하였음. 그리하여 일금 750원으로 매매의 약속이 성립되었음. 학교 후원회 쪽에서는 100원 정도면 팔릴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너무나 고가인 관계로 놀래어 군 당국에 상담하니, 유물의 매매는 고적·유물 보존 규칙에 의해 불가하다는 지시를 받았음. 그 뒤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연속되었음. 이상이 경찰관에게 들은 대요임. 부산의 매수인은 대구의 이치다에게 전매할 약속을 했었고, 이치다는 후지다 촉탁(총독부 소속)에게 상담이 있어 이번에 출장·조사를 하게 된 것임.”
걸작 ‘쌍사자 석등’은 부산의 악질 골동상(일본인이었을 듯함)과 대구의 간접적인 유물 약탈자였던 이치다의 손이 뻗치면서 당장 중흥산성에서 해체되어 옥룡면사무소 앞에 반출됐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격적인 매수 수법에 놀란 주민들이 뒤늦게 불법 행위임을 깨닫고, 이어서 당국이 개입하자 일본인 무법자들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석등은 한동안 광주의 전남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1937년 1월 5일에 서울 박물관으로 올라와 그 해 11월에 경복궁 안에 복원되었다. 그 공로자는 오가와였다. 그 후 아마누마라는 일본인이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오가와가 그 석등을 일차 조사하고 서울로 올라와 총독부에 복명하여 유물 등록 수속을 마치고, 그 해 12월에 재조사한 끝에 서울로 운반해왔다. 하마터면 골동상의 손을 거쳐 대구의 부호의 소유로 돌아가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을 살려 지금 총독부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 장식 승탑] 보물 135호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 장식 승탑] 보물 258호
당시 대구에는 이치다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악명 높은 일본인 수집가가 있었다. 남선 전기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였다. 그런데 이 오구라는 이치다가 걸작 석등의 불법 입수를 꾀했다가 실패한 전남 광양 지방의 어느 절터의 탑 속에서 약탈된 작은 ‘금동 8각 사리탑’ 하나를 말썽 없이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또 경주 부근의 어느 석탑 속에서 훔친 작은 ‘금동 3층탑’도 취득하고 있었는데 모두 희귀한 걸작이었다. 8·15 해방 전후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둘 다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돼 있다. 오구라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대구 시내의 자기 집에 온갖 종류의 풍부한 도굴 및 약탈 문화재 컬렉션을 향유하고 있었는데 그 때 정원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의 걸작 ‘석도 부도’ 둘은 8·15 해방 이후 귀속 재산으로 대구시가 압류하고 있다가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보물 135호와 258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 어느 절터에서 반출된 것인지는 배후의 장본인이었던 오구라가 약탈과 입수 경위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부도들은 과거의 총독부 때에도 이미 주목되어 1942년 6월에 모두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국보 40호
경주 근처인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하는 국보 40호의 ‘정혜사 터 13층 석탑’(통일시라시대)은 1911년에 약탈될 뻔했었다. 수명의 반출 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놓았을 때, 마침 한 마을 사람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어느 놈들이냐?”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치고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 후 이 13층 석탑은 땅에 내려진 탑재들을 되 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10층탑 꼴로 서 있었다. 그 통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칠곡 정도사지 5층 석탑] 보물 357호
지금 서울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357호의 ‘정도사 터 5층 석탑’에 대해서는 1968년에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이 발행한 <문화재 대관>(보물편) 상권에 ‘1924년에 원위치(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에서 현위치로 이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1912∼1913년에 일본인 조사가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1868~1935)가 발표한 논문 <조선의 석탑파>에는 ‘그 전에 벌써 칠곡 절터에서 불법 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 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고 밝혀져 있다. 그 후에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 왔던 것 같다.
'가던 길 멈추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거창 심우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尋牛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0) | 2017.02.10 |
---|---|
[스크랩] 북한의 국보 145호(27) / 사리원 경암루(沙里院 景巖樓) (0) | 2017.02.08 |
[스크랩] 거창 상림리 석조 보살 입상(上林里 石造菩薩立像) (0) | 2017.02.08 |
[스크랩] 북한의 국보 119호(26) / 평양 온달 장군과 평원왕 공주의 묘 (0) | 2017.02.08 |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20) /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葆華閣)의 부도와 석탑 (0) | 2017.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