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16) /
행방불명된 보리사(普提寺) 터의 부도(浮屠)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공관 정원에 보물 351호로 지정돼 있는 팔각 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가 있다. 고려 초기의 우아한 석조 유물이다. 문공부 발행의 <문화재 대관(文化財大觀)>(보물편) 상권은 이 부도의 원위치에 대하여 ‘확증은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 터로 추정되고 있고,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서울 시내 남산동 집에 와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양평의 보리사 터에서 일본인이 반출해 온 것이 분명한 것 같으나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없어 그저 ‘석조 부도’라고만 명명돼 있는 이 보물을 이화여대가 입수한 것은 1956년이었다. 총장 공관을 새로 짓고 정원을 꾸미게 되었을 때 정원 설계를 맡았던 사람이 남산동 1가의 어느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값진 나무들을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과거 일제 때에 증권으로 치부했던 일본인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살았었다는 집이었다. 좋은 나무가 많았고 귀한 식물도 있었다. 이화여대에선 그것들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 때 남산동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놓여 있던 이끼 낀 부도 하나도 묻어 왔다.
이화여대로선 뜻하지 않았던 굉장히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앞의 부도는 총장 공관 정원에 옮겨 세워진 후 금세 관계 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어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몇몇 전문가는 이 유물이 1911년에 일본인 악당들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추었던 보리사 터의 석탑(부도)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 현지 조사까지 하였는데 확증은 못 잡았지만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수십 년 동안 행방불명으로 증발했던 보리사 터의 귀중한 유물 하나를 되찾게 된 셈인데 과거 총독부 조사 자료에는 이 부도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 반출 경위가 밝혀져 있다.
먼저 1916년의 총독부 <고적 조사 보고(古蹟調査報告)>. 당시 조사자는 일본인 전문가 이마니시 류(今西 龍; 1875~1932)였다.
“(현재 보리사 터에는) 현가 탑비의 비신·귀부·이수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그 외 현기탑(玄機塔)이었을 하나는 마을의 김선호 등의 말을 빌리면 수년 전까지 귀부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는데 일본인이 서울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
조사자 이미나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단서로 붙이고 있다.
“이미 서울 방면으로 반출된 현기탑을 색출해내어 박물관에서 영구히 보존시키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람.”
여기서 현기탑일 거라고 이마니시가 추측한 것은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玄機; 862~930)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부도를 말하는 것으로 부도도 탑의 일종이다. 현기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스승이었다. 왕건(王建; 877~943, 고려 태조)이 신라를 멸망시킨 후, 현기를 양평 미지산(彌智山) 기슭의 보리사에 가 있게 했었다. 대경대사는 시호. 그래서 보리사에는 그를 기념하는 탑들이 세워졌던 것인데 그 후 절은 폐멸하고 탑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마니시는 이미 반출당한 부도 탑은 그 행방을 찾되 현지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탑비라도 서울로 옮겨 오는 것이 좋겠다고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천 년의 옛 비석이 선려하게 유존됨은 경탄할 일임. 국보로서 보존시켜야 함.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보존시키기는 어렵고 서울의 박물관에 옮겨서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람.”
그 후 총독부는 이마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현기탑 비를 서울로 옮겨 1915년에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총독부 박물관(후에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현재 경복궁 잔디밭의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361호의 ‘대경대사 탑비’가 본래의 절터를 이탈한 경위이다.
한편 1917년 12월에 경기도 경찰부장은 총독부 정보과장 앞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양평 보리사 터 석탑(부도탑) 반출 내막의 조사 보고를 올리고 있다. 이마니시의 조사 정보와 의견에 따라 총독부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 터에는 이중 탑(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부도는 얼핏 2층 석탑 같은 형태이다.)이 있었는데, 절터의 논밭 임자인 함백용·박영범·박돈양 세 사람이 이웃의 상원사(上院寺)로 하여금 그것을 옮겨 가도록 기부했던 바, 1909년 7월 어느 날 일본인 3명이 상원사를 찾아와서 그 석탑을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거듭 끈덕지게 요청하였다 함. 그러자 최화송이란 주지가 기증자인 앞의 세 사람과 협의하여 결국 120원을 받고 석탑을 팔아 넷이서 분배해 가졌다 함. 그러나 그들은 그 때 석탑을 산 일본인의 주소 성명을 모르고 있었으며, 다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만 말하더라고 함. 한데 조사해 보니 그 때 석탑을 삼으로써 어디로든지 반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일본인은 본정(지금의 충무로) 2가 18에 살고 있는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와 약초정(지금의 초동)에 사는 다카하시란 고물상이었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그 석탑을 1911년 8월에 명치정(지금의 명동) 2가에 사는 시로 로쿠타(城 六太)에게 500원을 받고 다시 팔았음. 그렇게 석탑의 소유권을 인수한 시로 로쿠타는 730여 원의 운반비를 들여 그것을 반출하였고, 현재도 그가 가지고 있음.”
이 경찰 조사는 양평에서 반출된 보리사 터의 부도 탑이 1917년 12월엔 당시 서울 명동에 살고 있던 시로 로쿠타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이렇게 소재지가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그것을 압수하거나 다시 사들여서 이마니시가 제의한 것처럼 박물관에 넣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부도는 그 후 또 다른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아주 행방을 감추었다. 이렇게 완전히 잊혀졌던 것이 45년 후인 1956년에 명동과 바로 이웃인 남산동의 과거의 일본인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인데, 전의 집주인이었던 닛타가 시로 로쿠타에게서 직접 사들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과거의 닛타의 집에서 나타난 부도가 1911년에 시로 로쿠타가 사서 가지고 있던 양평 보리사 터의 현기 부도 탑, 바로 그것이라는 확증을 잡을 길이 없다는 이유로 오늘날 보물로서의 지정 명칭이 다만 ‘석조 부도’라고만 돼 있는 것은 이 부도가 일제 아래의 비운에서 아직도 깨끗이 풀려나지 못한 억울한 숙명이다. 문제는 8·15 해방 때 닛타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일본으로 쫓겨 감으로서 그의 정원에 숨겨져 있던 부도는 10여 년간 완전히 족보 불명이 돼버렸던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은 언젠가는 전문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산동의 부도가 이화여대로 옮겨진 후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연구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평 보리사 터의 그 현기탑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동안 족보를 잃었던 부도는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밑의 가장 전형적인 수난과 비운의 문화재인 이 부도에 대하여 장문의 학술 논문을 쓴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현기탑이 서울로 반출된 장소와 이화여대의 부도가 발견된 장소가 동일한 지점은 아니나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해방 후 명동 부근에서 발견된 유일한 부도인 데다가 각 부의 양식과 조각수법이 고려 초기로 현기 탑비와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현기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사총> 12·12합집, 고려대사학회,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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