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낙원 빌 / 정채원

문근영 2016. 5. 7. 08:19

  낙원 빌

 

     정채원

 

 

 

   불빛을 등지고 앉은 내 뒷모습이 보인다 불빛을 마주한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없다 604호 불빛에 먹혀버린 사람은 왼손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808호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죽은 사람이 있다 곁에는 내 친구들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 펼쳐져 있고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도 떨어져 있다 이인삼각 놀이를 하다 너는 발목을 나는 목을 부러뜨렸지 숨이 막혀도 서로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어 내가 가장 아끼던 모자는 화장실에 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305호 문이 잠겨 있다 문 앞에서 나와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는 꼭 내 어릴 때를 닮았구나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스피린을 사오던 나는 20년 후의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이는 나를 피해 비상구 쪽으로 가려 한다 계단들 벽들 문들을 지나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나를 피해가지 못한다 지하에서 백년옥 1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는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생일은 첫눈 내리는 4월의 밤, 어떤 기억도 기대도 없이 한 사람이 낙원에 막 당도했다

 

 

 

                        —《현대시》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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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원 / 서울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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