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神書 / 임희숙

문근영 2016. 5. 3. 03:15

神書

 

   임희숙

 

 

 

자해의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손목을 그은 비장한 심장의 혈구들은 소통을 멈추고 비어졌다

임진강 암벽에 불거진 칼날 자국들

빛나는 직선과 오묘한 곡선을 읽는 강물의 碑文 낭독은

캄캄한 밤마다 울어대는 짐승 소리에 섞인다

 

고된 길을 느리게 돌아나가는 물살이

몸을 구부려 쓰고 나간 은밀한 답문

아름다운 꽃과 뱃사공의 노래와 죽은 여자의 푸른 치마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람들의 힘이다

 

물은 무르고 아찔한 손톱을 가졌다

강이 품은 수천 년의 유서는 대필되었다

문장은 산화되고 박리되어 꽃처럼 피고 지고

죽은 꽃과 새로 뜬 별이 강물에서 하늘로 옮겨 다녔다

 

암벽의 유적들을 핥는 일은 강물이 얻은 최초의 노릇

새로 神書를 쓰는 핏빛 저녁이다

 

 

 

                       —《현대시학》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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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숙 / 1958년 서울 출생.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 1991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격포에 비 내리다』『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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