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뒤
하재연
습기가 모아졌다가 톡 하고
물방울로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보이지 않으니까 들린다
꿈의 한가운데가 녹아 없어진다
얼굴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목소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은 한 번도 지어본 것 같지 않은 표정을 하고
밥을 먹는다
동일한 양의 쌀은 동일한 양의 물에 불어 있다
5분 7분 15분 나는 동일한 시간을 기다린 것뿐인데
밥솥의 추는 언제나 다가오는 기차처럼 울리고
너는 옆방의 벽지 밑에서 나는 아랫방의 커튼 뒤에서
우리는 동일한 양의 잠을 잔 것뿐인데
때로는 질척하게 때로는 끈끈하게
섞이지 않고 부풀기만 하는 꿈들
이불 밖으로 흘러넘치는
나는 401호의 문을 열고 나와
614호의 번호키를 누른다
띡띡띡띡
아니 이것은 301호 남자의 목소리다
띡띡띡띡 띡띡띡띡
아니 이것은 615호 여자의 얼굴이다
세 개의 마음을 가진 검은 구멍을 통과해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간다
—《현대시》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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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 1975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라디오 데이즈』『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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