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자판기
이기인
저울에 올려놓을 수 없는 표정
재난을 입은 구름이 버리지 못한
잘 사용하지 않는 명함 뒷면
내내 쇠약한 논쟁을 닮아가는 대중버스
뜨거운 배기통 더러운 성격 매연 막스 베버
차가운 입술을 데우는 커피와 물 프림
이웃사촌끼리 질문할 수 없고
순결을 복수해버리는 이해 불가능한 근친
커피 프림 설탕 서정 설탕 프림 커피
친한 물질 사이에 떨어지는 설탕
오래된 메뉴의 가려운 서체
모두의 혼합물이 동시에 사정하는 자판기
참고할 만한 고전 입문서
녹슨 표지 붉은 가루
가로세로 크기가 비슷한 사어 시집 상자
글자들을 구입하고 남은 바지 속 동전은 홀수
잃어버린 먼 사치의 날씨
어쩌다 태어난 말줄임표 감정
권태로운 벽을 짊어진 늘어나는 벽
벼랑 끝의 조화 뿌리 굵은 철사
좀처럼 살이 빠지지 않는 시의 조연들
자판기 소수 언어의 이미지 편집
회복할 수 없는 수상한 자아검열
환청만 살아 있는 자판기 속 두꺼운 장막
소모되는 시인의 큰 손에 떨어진 동전
구겨지지 않은 종이컵 원고지
아직 얇은 종이와 컵의 가벼운 관계
—《현대시》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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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 / 1967년 인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성균관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ㅎ방직공장의 소녀들」 당선. 시집『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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