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시인의 영토 (외 1편) / 전기철

문근영 2016. 5. 2. 08:22

시인의 영토 (외 1편)

 

    전기철

 

 

 

   한 시인이 죽었다. 일흔도 넘은 시가 죽었다. 어둠과 추위만이 찾아오는 이십만 원짜리 쪽방이 죽었다. 일흔의 미로가 죽었다. 여기 무늬 진 심장박동 몇 구절을 번역해 본다.

 

   나는 시 없는 시인이라네.

   청탁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시를 써 본 적도 없는 시인이라네.

 

   세상의 끝에 매달려 있는

   로맹가리의 카페에

   뿌리를 내리고 허공에 낙서를 한다네.

   아침이면

   비애로 세수를 하고

   짓밟힌 어둠을 친구 삼아

   모든 양심들에게 전화를 한다네.

 

   나는 노트 한 구석에서 떨고 있는 우울, 거울 속을 걷는 유령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나를 읽을 수 없다네.

   달로 이민을 가려고

   야곱의 사닥다리를 오르며

   죽은 자들과 친구 하고

 

   산 자가 그리우면

   산 너머

   떡갈나무에게 하소연하는

   나는 불운의 연습장

   고독의 전단지라네.

 

   그림자마저 벗어놓은 고독한 생이여, 나이가 많은 산에게 물어보면 그림엽서 너머에 있다고 하고 찢어진 영혼이 걸려 있는 고사목들에게 물어보면 “환상 속에는 바람이 붑니다”* 노래한다.

 

   나의 시는 어둠을 아는 장님만 읽을 수 있고

   절망 너머를 볼 줄 아는 자만이 읽는다네.

   지구가 도는 소리를 듣는

   나는 이 세상의 낙오자라네.

 

   한 외로움이 죽었다. 어느 시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가 죽었다. 나는 낯선 시간 속을 떠돌았다. 도시의 발바리들이 설치는 거리, 우울이 드나드는 술집, 담쟁이가 지나간 길

 

 

  ————

  *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의 가사.

 

 

 

발해의 말 장수

 

 

 

전쟁이 끝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점점 말을 잃어 갔다.

어머니는 귀환병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묻지 않았고

담배를 불침번으로 세우고는

세잔의 사과처럼 아무데나 퍼질러 앉았다

 

아버지의 이름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모든 사물들은 우리를 외면했고

새들도 나날이 뻔뻔스러워졌다.

어머니는 외로움과 친구가 됐고

나는 권태를 발명했다.

내 유일한 위로는 밤하늘의 시리우스였는데,

밤이면 시리우스를 데리고 먼 곳까지 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오곤 했다.

 

별이 뜨지 않는 밤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한 상이군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휘파람을 불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낡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행상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고요를 머릿속에 채우고

누워 있으면

그 군인의 악기가 울었다.

나는 발해의 말 장수라네.

수많은 전쟁을 지나 국경을 넘은

발해의 말 장수라네.

두만강을 건너 아무르 너머

발해의 말 장수라네.

 

어머니는 외로움을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나는 말 장수의 악기가 내 심장을 연주하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두만강 건너 아무르 너머

말을 달리면

안개 자욱한 초원이 있다네.

외로운 이여,

내 왼쪽 가슴에 난 창문을 열어

청동 말을 타고 가면

꿈꾸는 발해가 있다네.

 

나는 발해의 말 장수

세상을 건너는 말 장수

神道로 말을 달리는 발해의 말 장수

안개를 데리고 다니는

발해의 말 장수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나는 방을 뛰쳐나갔다.

하늘에서 찬란하게 짖고 있는 시리우스가

금세라도 나를 데리고 먼 발해로 달려갈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발해의 말 장수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혼몽한 밤안개 사이로

밤새 짖어대던 시리우스

 

 

 

                        —시집『누이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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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 1954년 전남 장흥 출생. 198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누이의 방』등.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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