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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사뼈를 만지다 (외 2편) / 박수현

문근영 2016. 4. 25. 06:44

복사뼈를 만지다 (외 2편)

 

   박수현

 

 

 

난데없이 부어 오른 왼쪽 발목의 복숭씨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익었다

의사는 벌써 몇 번째 주사기로 물을 빼낸다

복숭아, 나직히 중얼거리기만 해도

분홍빛에 오금 저려 덜컥 물러지던

솜털 보송보송한 때를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복사뼈를 복숭씨라 부르는 것일까

 

모자라거나 넘친 마음들은 가지를 떠나는 걸까

비온 뒤 단맛 빠진 낙과를 광주리에 주워 담던

여자의 물크러진 한나절에는

쪼글쪼글 벌레들이 하얗게 오글거렸다

그런 밤이면 원두막 시렁에 얹힌 달빛도

연분홍, 진분홍으로 짓물러졌다

 

과육 반점이 부풀어 오른다

꿈틀대는 씨앗을 쪼개 벌레를 끄집어낸다

꺼이꺼이 발목께에서 펌프질하는 복숭씨여

한 바가지 마중물이 퍼 올린 복숭앗빛에

여자는 두 발을 이리저리 포갠다

 

 

 

어두워지는 연못

 

  

 

이사를 앞두고 부부용 베개를 버린다

흰 속청은 얼룩지고

메밀 알갱이는 푸슬푸슬 부서지는데

베갯모 속 원앙 한 쌍은 여전히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다

베갯모 테두리 예서체 청홍 목숨 수(壽)자가

유록빛 수면 위에서 정갈한 이음수의 단잠을 허무는 동안

자줏빛 날개를 펼친 수컷과 다소곳한 암컷의 어깨가

당초구름문 밴 물풀 사이 반쯤 접혀져 있다

함께 살 셋방 얻느라 미리 당겨 쓴 계금을

꼬박꼬박 부어 나가야 하듯

일생 상대에게 붓는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저 연못으로 한 땀 한 땀 호는 햇살과

장대비와 석 달 열흘 가뭄을 마다할 수 있었으랴

늦은 오후, 수면에서 굴절되는 햇살이

서로를 참아내느라 자글대는 눈가를

간신히 매듭수로 꿰매며

소금쟁이처럼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간다

 

 

 

銀星 갤러리

 

 

 

강 노인은 훔친 의치를 물컵에 모았다

최 노인은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아 빨래한다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었다

심 노인은 패드 넣은 비닐봉지를 페니스에 묶은 채 복도를 서성였다

서 노인은 씹던 껌과 식은 밥 뭉친 경단을

다른 이에게 먹이려다가 자칭 보안관 김 노인에게 쥐어 박혔다

박 노인은 늘어진 노랫가락을 웅얼대며 현관문에 기대고 있었다

 

저녁 8시, 요양보호사 미나 씨가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두 알의 수면제를 먹고

노인들은 저마다 잠으로 빠져들었다

허기진 입들이

당나귀처럼 커지던 귀가 지워졌다

낮 동안 금시계처럼 번쩍거리던 눈길도

벽에 걸린 풍경화처럼 평온해졌다

 

가을, 겨울, 여름이 지나가도

이곳은 언제나 나른한 봄날

노인들 흉곽을 맴돌며

쟁여둔 그 많은 소리 다 삼킨 괘종소리만

혼자 복도를 빠져나와

어느 먼, 먼 은하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집『복사뼈를 만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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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으로 등단.  '溫詩' 동인. 《시안》 편집위원. 시집 『운문호 붕어찜』『복사뼈를 만지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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