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마야코프스키의 방 / 이병일

문근영 2016. 4. 24. 06:40

마야코프스키의 방

—죽음의 여행경로

 

   이병일

 

 

 

램프 향기가 창의 커튼을 살짝 들치는 밤

나는 불가능의 꿈을 꾸는지 한잠도 못 잡니다

관자놀이를 꽉 눌러 두통의 혈을 지압합니다

먼 곳에서 바지를 입은 구름들*이

세상의 굉음들에게 경멸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억울하게 능멸 당했던 시간을 곱씹다 보면

지루하고 질긴 살 거죽을 벗어 던질 수 있겠지요

당신은 시 한 구절이 정치를 깨트리는지 아십니까?

램프 불의 심지가 가물가물 사위어가는 동안,

나는 또 먼 미래로 캄캄히 떠내려 갈 거예요

북미의 지명을 수첩에 빼곡히 적고 있을 때

일광의 끝이 번쩍 빛나듯 지도책이 환해집니다

 

삐죽삐죽 우울한 활자 돋아있는 듯한 책갈피,

나는 그걸 흡혈하며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지금도 내 눈 밑은 점점 시꺼멓게 물들고

오래된 시대는 뜬 눈으로 내 영혼을 드나드는 거죠

나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연필심으로 손목을 사소하게 그어보지만,

 

오래전 잃어버린 비명만이 입속을 맴돌 뿐

나는 차오른 달이 기울어지는 새벽까지

의지와 상관없이 책 속에 파묻혀 있을 거예요

얼굴 없는 혁명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미로의 흰빛을 좇아 이방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제 혁명을 말하기엔 너무나 늦은 셈입니까?

 

오늘도 아무런 개연성도 없고

오류에 젖은 책들을 너무나 많이 읽은 탓에

이 세계는 돌연 저 혼자 고요하게 희미해집니다

당신의 하루가 조용히 들이닥칠 시간

죽음을 향해 떠나는 여행경로를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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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집.

 

 

                        —《문학. 선》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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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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