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돋보기안경 / 김기택

문근영 2016. 4. 23. 07:07

돋보기안경

 

   김기택

 

 

벗어서 책 위에 올려놓은 후에도

안경은 여전히 무엇엔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뭇거뭇한 것이 렌즈 안에서 꾸물꾸물 형체를 갖추더니

곧 선명한 글자들이 된다.

 

책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렌즈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머뭇거리고 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파리는 검은 덩어리에서 나와

잔털이 촘촘하게 돋은 몸통과 다리가 된다.

헬멧처럼 커다란 눈으로 덮인 얼굴이 된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짠 날개가 된다.

 

너무 오래 껴온 탓에

안경에 붙박인 눈알이 빠지지 않는다.

눈이 자는 동안에도 안경은 눈을 감지 않는다.

잠시도 깜박거리거나 한눈파는 일이 없다.

어둠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잔글씨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힘찬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내 얼굴은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다.

꿈이 안경테 안으로 모인다.

꿈 틀이 열심히 꿈틀거리더니 곧 또렷해진다.

안경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꿈들은 안절부절못한다.

 

결코 감을 수 없는 크고 두꺼운 눈에

파리는 여전히 붙잡혀 있다.

안경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도망가지 못한다.

파리가 렌즈에 박힌다. 양각된다.

알몸이 다 드러난 채 종이에 붙박여 움직이지 못한다. 

 

 

 

    —계간 시 전문지《POSITION 포지션》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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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57년 안양 출생. 1989년〈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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