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화살표 (외 1편)
박남희
사과나무 위에서 푸른 화살표가 기어간다
과녁을 향하여
과녁 너머의 세상을 향하여 기어간다
화살표가 구불구불 기어간다
허리를 접었다 펴며 과녁을 지우며 기어간다
신은 왜 그 많은 벌레들을 화살표로 만들었을까
화살표가 화살보다 느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화살표 끝에 과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화살표가 된 벌레들은 종종
이파리가 화살인지 과녁인지도 모르고 갉아먹어버린다
그런 다음 배부른 화살표는 느리게 느리게 기어간다
화살표는 화살을 꿈꾸지 않는다
화살표가 된 벌레는 속도를 의식하지 않는다
푸른 화살표의 행방은 빌헬름 텔도 카프카도 모른다
화살표에게는 도처가 과녁이고 과녁이 아니다
하늘에 화살표가 뚫고 지나간 구멍이 보인다
화살표는 구멍을 통과할 때마다 살이 찐다
그때 구멍도 살이 쪄서
하늘로 둥둥 환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살찐 구멍은 벌레가 어둠을 갉아먹은 흔적이다
화살표는 어둠속 뻥 뚫린 구멍을 지나
환하게 환하게 광활한 우주의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둠은 화살표의 속도도 행방도 모른 채
제 살을 기꺼이 화살표에게 내어준다
세상의 눈들은 그동안 수없이 화살표를 따라다녔지만
캄캄한 어둠이 자라서 탐스러운 과일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화살표가 화살을 꿈꾸지 않는 것은
그 속에 벌레의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격월간《시사사》2013년 3-4월호
물을 버리기 위해 꽃이 핀다
가을 하늘은
물을 버리지 못해 푸르게 멍이 들었다
눈 시린 쪽으로 물을 버리지 못해
홍시는 붉게 멍이 들었다
뒷산 단풍도 물을 버리지 못해
화끈화끈 얼굴을 붉히고 있다
물은 버리라고 있는 것이여
다랑논 갈대는 허옇게 말하지만
물을 버리고 나면
저렇게 색마저 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둑방에 물을 가두고 끝끝내 버티고 있는
저 저수지는 또 어쩔 것인가
푸르다가 점점 더 흐려지는
저 저수지의 색은 또 어쩔 것인가
가을에는
물을 버리기 위해 꽃이 핀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던
색을 버리기 위해 꽃이 핀다
—《시문학》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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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현재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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