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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분홍주의보 (외 1편) / 김경주

문근영 2016. 4. 20. 09:19

분홍주의보 (외 1편)

 

   김경주

 

 

 

자다가 깨어나 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아

자주 찬물에 샤워를 한다

침팬지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고 있는 것은

공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데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런 날 나는 너무 자주 웃었거나

화장실에서 오줌 누고 돌아온 후

방금 자지를 주물럭거렸던 손으로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꼬락서니다

 

마침내 복서의 입에서 마우스피스가 툭 떨어진다

하—

 

그보다 마일드한 담배.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좋았을

지루한 12라운드를 다 지켜본 기분이랄까

심판이 승자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주지 않고 다가가서 선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넨 자네 삶과 밀월을 즐기는 것 같군 그래."

챔피언이 그를 보며 침팬지처럼 헐떡거려준다

그런 그로테스크한 직무 유기가 있나

관중들의 유미주의가 술잔을 내던졌다

 

저녁에 찾아오는 술자리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늑대 사냥터였다고 하는데

 

독수리가 이유 없이 양봉을 습격했다는 다큐가 자꾸 떠오른다

 

 

 

당신의 눈 속엔 내 멀미가 산다

 

 

 

벽 틈으로 들어간 달팽이가 사흘이 지나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벽에서 일어나는 붉은 비린내를

빛을 외로워한 그 달팽이가

안에서 혀를 깨물고 있을 것 같다고 여길 때

물기의 층을 거쳐 태어난 목젖이 자기 음악을 알아보고

집 안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을 때

 

옥상의 노란 정화조 탱크 속에

지친 새 한 마리 눈을 감고 떠 있을 때,

구슬처럼 행불이 된 연인을 찾아

투명한 뼈를 가진 벌레들을 가방에 모으며 여행할 때

남몰래 아주 긴 피로 별자리를 물들이고

너무나 많은 달걀 안의 수도를 알고 있지만

방에 귀만 넣어두고 자야 할 때

 

오래된 미라의 귓속에 가만히 내 귀를 대어 보았을 때

 

내 귓속의 죽을 당신에게 다 흘려준다고 생각했을 때

오래 비운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헐리고 있을 때

구멍 속에서 고운 가루가 된 달팽이를 발견하고

목으로 인어들이 우루루 밀려올 때

 

유리에 금이 오른다

번지는 일로만 여러 번

당신의 손가락을 물고 잠들고 싶었는데

 

그대를 더 연하게 만드는 여행들

 

 

 

                        —시집『기담』(200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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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기담』『시차의 눈을 달랜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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