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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잠든 양들의 귓속말 / 김재근

문근영 2016. 4. 19. 06:39

잠든 양들의 귓속말

 

  김재근

 

 

 

오늘 밤엔 눈이 멀어

눈먼 양들을 데리고

눈보라 속으로 여행 간다

 

어제는 강가에서 잠을 잤고

양들은 내게 기대고

나는 양털에 귀를 묻고

눈보라 내리는 강물 속으로

잠든 우리의 귀는 눈동자가 하얀

물고기 울음을 듣고 있었지

 

양들은 백년 전부터 울었고

나는 백년 후에 죽었는데

눈보라는 왜 이제 내리는 걸까

 

눈보라는 왜 흐리게만 돌아오는 걸까

내리는 눈보라가 백년 전의 말을 한다

나의 귀는 딱딱하고

눈동자에 얼음이 이제 끼는데

술래잡기하듯,

먼저 내리는 눈보라

 

오늘 밤엔 강가에서 잠을 자고

잠든 양의 무릎을 베고

백년 동안 눈보라 내리는

눈보라를 보며

밤이 우화羽化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

 

귀는 맑아져 백년 전의 양들과

백년 후의 내가 만나고

양들과 내가 강물에 가라앉아

울먹이는 물속에서

양들과 나의 귀는

백년 동안 울던 귀를 열고

귀 안의 울음을 캐고 있었지

 

귀가 더 깊어지기 전

귀가 더 넓어지기 전

 

귓불에 닿는 눈보라

귓불에 닿는 눈보라

 

눈보라 닿는 귓불의 무늬를 주워

서로를 위로했지

감은 눈이 하얗고 나의 목소리는

양의 목소리 같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때

백년 후와 백년 전이 함께 돌아오고

나는 양들의 손등을 핥고

양들은 나를 끌고

강가로 나가 물을 먹여줬지

 

물속을 두드리면

양들은 응애응애 울고

우는 양들을 헤아려보는

나의 귀는 백년 전에 떠났던

울음이 불쌍했지만

귀를 잠그고

백년 후에 도착하는 울음을 기다렸지

 

양들과 나의 귀가 겹치는 곳

몸을 구부린 채,

얼굴을 다 숨길 수 있는,

귓속말처럼,

 

 

                       —《창작과비평》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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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 1967년 부산 출생. 부경대 토목과 졸업. 2010년 <창비>신인상으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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