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忌日) (외 1편)
강성은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환상의 빛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문학과 사회》2013년 봄호
-------------
강성은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문학동네》신인상 당선.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야생부추 / 강회진 (0) | 2016.04.17 |
|---|---|
| [스크랩] 핸드프린팅 / 김혜영 (0) | 2016.04.17 |
| [스크랩] 게와 연꽃 / 오태환 (0) | 2016.04.15 |
| [스크랩] 그리운 늑대 / 유미애 (0) | 2016.04.15 |
| [스크랩] 빈 방 / 박찬세 (0) | 2016.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