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불과하다 / 김도언

문근영 2016. 4. 13. 07:54

불과하다

 

     김도언

 

 

 

   1.

 

   아버지는 애매한 나이에 죽었다. 비상하는 새보다 조롱에 갇힌 새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좀 더 일찍 죽었다면 나는 새장을 짜는 기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더러운 옷을 입고 누운 채로 구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다가 갇혀버린 검은 새를 상상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침묵으로 일관할 때, 형의 악보에 검은 잉크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형의 여자들과 불화했다. 그들의 메모를 고의적으로 형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허술한 방문을 잠그고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청춘의 헛걸음을. 형의 이름이 검둥이 조joe였다고 해도, 어머니가 이슬람교도였다고 해도 나는 나에 불과하다. 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서 처음 목격된 흉터다.

 

 

   2.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들, 신분을 알 수 없는 동료들과 철지난 모자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장례식들, 순진한 식당과 정류장들. 내가 나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런 것들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누군가 애매한 나이에 죽을 때, 남겨진 자들은 예외 없이 그릇된 판단을 한다. 식탁을 부수고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땐 이미 방문을 잠글 수도 없다. 어느 날, 어머니가 평생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의 가난이 자라 담쟁이넝쿨처럼 앙상한 무릎을 타고 머리끝에 올라선다. 그건 고결함 때문이 아니고 무심함 때문이란 걸 당신은 아는지. 서랍을 열고 알약의 색깔을 주판알처럼 맞춰보던 밤, 이 모든 것은 나는 나에 불과하다는 신념이 사주한 풍속이었으니, 불과하고 또 불과하다.

 

 

 

                      —《시와반시》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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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1999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악취미들』『랑의 사태』등. 장편 『꺼져라, 비둘기』로 제6회 허균문학작가상 수상. 2012년 《시인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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