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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 환대의 기억이 잊힐 즈음 / 이민아

문근영 2016. 4. 7. 01:20

이 환대의 기억이 잊힐 즈음

 

   이민아

 

 

 

통도사 서운암 도자기 가마에 불을 넣는 밤

보름달이 뜨면, 한 사내는 불을 쓰다듬고

불을 쓰다듬던 바람은 잠자코 일렁이다

미처 쓸지 못한 유리가루 같은 저 달무릴 삼키지

간절히 무릎 꿇은 것들의 성체를 삼키고 나면

그리운 것들은 한데 타서 한 부족의 문신처럼

재가 된 제 몸이 길의 흔적이 되지

이승에서 이 환대의 기억이 묻힐 즈음

저마다 불 앞에서 젖은 손을 펴 서운했던 사연을 쓰지

 

계절이 지구 밖으로 펼쳐질, 그쯤 나도 가끔

가마 앞에 앉아 내게서 잊히지 않은 그대

벽화의 채색처럼 무척, 더디게, 풍화되는 보름달이 뜨면

수천 번 무릎을 꿇고 나無를 던지지, 나를 던지지

손바닥만한 가마 불창 속으로 창살나무를, 창살을 꽂아 넣지

누가 저 사발들을 불로 만든다고 했나

누가 저 가마 속 흙의 운명을 장작의 일이라고 했나

우리 인연이 받던 찻잔과, 나눠 간직한 전별의 사연은

무수한 창살을 가슴으로 받아도, 피로 붉게 물들어도

때로는 잊을 수 없는 것, 그 증명 앞에 무릎 꿇는 것

 

불을 넣다 무릎을 꿇고 황혼 같은 먼 벽을 보는 밤이

고해의 밤이, 생이 끝나기 전까지 때때로 내게 오겠지

천체를 조율하던 지구의 메아리가

어둠이 껴안은 숲의 겨드랑이에 머물다 되돌아오는 밤

   수줍어 물들던 그대 볼이 생각나고

   그대와 걸었던 이별의 성곽이 생각나고

소나무 장작처럼 말라가는 그리움의 시취가 사뭇 오래

살갗 터진 가마의 늑골에서 안개처럼 배어나오는

밤, 같은 새벽, 깊은 밤, 깊이 쓰다듬던 그대 손등 같아

나도 모르게 한 움큼 야윈 재를 들어

새벽이 오도록 지구의 틈을, 결별의 틈을 덮는 밤

 

 

 

                      —《신생》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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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 / 1979년 서울 출생.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동아일보와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 시집『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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