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들
안미린
깨진 계단에서 멈췄다
깨진 건 차갑지 않은 적 없어
계단은 청회색 기계로 굳혀 놓은 것
깨진 계단은 청회색 점선의 이전(以前)
두루마리 휴지를 굴려 길을 만들어야지
가능한 한 펼쳐지는 칸칸의 골목,
점선을 건널 때마다 층이 접힌다
여름에 여름의 밑이 생긴다
오늘은 오늘의 곁이 생겼다
청회색 기계로 가볍게 얼린 것들도
점자를 아무렇게나 번역한 걸음걸이도
모래 위에서 다가가는 발자국
다가오는 발자국
망설이며 다가서는 리듬과
멀지만 아늑한 벌집, 비슷하게 기웃하는 이웃
벌들의 질긴 말풍선들도
더없이 흔들리는 소식과 함께
네가 고장 난 냉장고를 밀고 와
흰 것이야, 속삭였을 때
벌들이 알몸의 그림자를 쏘아 댔을 때
휴지를 돌돌 말아 길을 거두면
손바닥에 배어드는 부드럽고 씩씩한 속도
깨진 계단에서 굴렀다
깨진 건 구르지 않은 적 없고
씻어 낸 공간처럼 흔들린 잠깐,
이후(以後)는 사이다에 녹여 본 안개라는 것
—《시작》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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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린 /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2년 《세계의 문학》신인상 당선.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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