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위의 흰 눈 (외 1편)
유홍준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에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시와 표현》2013년 봄호
달걀 속의 밥
이것은
내용과 형식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그 옛날 닭 울고 개 짖던 유정란의 시절에
아버지는 젓가락 끝으로 톡톡 구멍을 내고 날달걀을 드셨네
목고개를 있는 대로 젖히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날계란을 드시는 아버지의 목울대는 또 다른 달걀
나도 알아, 목구멍 넘어갈 때의
그 계란 노른자와 흰자의
맛 차이
신기해,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올 때마다
어떻게 해서 이 둥글고 살색이고 따뜻한 게 만들어지는지 궁금
그것은 껍질에 대한, 형식에 대한, 내 첫 번째 질문
날계란을 다 마신 아버지는 그 속에 쌀을 안치고
우리에게 특별한 밥을 해 주셨네
계란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솥
아버지는 조심조심 쌀을 넣고 물을 붓고 아궁이 불씨 속에 그 솥을 앉혔지
계란 속에 든 밥은 언제나 된밥
그러나 신기하고 재밌고 맛있어
계란은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고
귀엽고 독특한 솥
그 솥으로 지은 밥은
형식과 내용에 관한 내 첫 번째 경험 이야기
—《시와 세계》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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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저녁의 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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