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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나긴 그믐 (외 1편) / 정끝별

문근영 2016. 4. 1. 09:16

기나긴 그믐 (외 1편)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 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드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뒷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뒤돌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들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새벽마다 목숨을 걸고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누운 사람을 보면 나도 따라 눕고 싶어

누구든 누워야 바닥에 가까워지고

누워야 누구든 쉽게 들고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다시 차오를 수 있을 테니

 

 

                        —《시인수첩》2013년 봄호

 

 

사춘思春

 

 

 

말랑한 곳에 털이 날 무렵

달리는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릴 무렵

거울에 돋는 꽃눈을 세다 풋잠에 들 무렵

 

뒷담에 한눈을 팔 무렵

귀에 노래를 꽂고 밥상에 앉을 무렵

때 묻은 풍선껌을 터트리다 지쳐 한잠에 들 무렵

 

허파에 바람이 들 무렵

창궐하는 것들과 한패가 될 무렵

부푸는 덤불숲을 헤치다 등걸잠에 빠져들 무렵

 

사로잡힌 일진一陣의 첫봉오리들

 

 

 

                       —《시인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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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시), 1994년〈동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등. 현재 명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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