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그믐 (외 1편)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 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드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뒷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뒤돌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들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새벽마다 목숨을 걸고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누운 사람을 보면 나도 따라 눕고 싶어
누구든 누워야 바닥에 가까워지고
누워야 누구든 쉽게 들고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다시 차오를 수 있을 테니
—《시인수첩》2013년 봄호
사춘思春
말랑한 곳에 털이 날 무렵
달리는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릴 무렵
거울에 돋는 꽃눈을 세다 풋잠에 들 무렵
뒷담에 한눈을 팔 무렵
귀에 노래를 꽂고 밥상에 앉을 무렵
때 묻은 풍선껌을 터트리다 지쳐 한잠에 들 무렵
허파에 바람이 들 무렵
창궐하는 것들과 한패가 될 무렵
부푸는 덤불숲을 헤치다 등걸잠에 빠져들 무렵
사로잡힌 일진一陣의 첫봉오리들
—《시인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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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시), 1994년〈동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등. 현재 명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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