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부뚜막들
장석주
여름 뜰이 윤리적으로 무너진 뒤
먼 데서 털을 세운 짐승들이 내려온다
궁리가 깊은 돌들과
파초가 잘 키운 상그늘 몇을 거느리고
국세청 세무조사팀보다는 덜 무서운 기세로
전무후무한 가을이 기습한 그 저녁,
이상한 게 이상한 것뿐이냐고,
쓸쓸한 게 쓸쓸한 것뿐이냐고,
항변하며 가을벌레들이 크게 우는 그 저녁,
내가 노동과 생계의 함수관계를 풀다 만 것은
오늘은 이미 내일의 옛날이기 때문.
지나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지나가고
옛날은 자꾸 새로 돌아오기 때문.
검은 눈썹이 식는 가을 그 저녁,
우리는 흑설탕을 넣은 차를 마시자.
그동안 적조했었다, 옛날을 다 탕진하고
그늘의 무미함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착해지려는 부뚜막들!
—《詩로 여는 세상》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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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신인상 당선,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어둠에 바친다』『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어떤 길에 관한 기억』『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붉디붉은 호랑이』『절벽』『몽해항로』『오랫동안』.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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