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림자들
김하늘
더 천해지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 입안에서 제 이름을 지우는 느린 자살의 언어, 살아 있는 일보다 사라지는 일이 더 쉬워서 손등으로 웃고, 낯선 여자와 몸을 섞으며 내 자궁 속으로 지는 노을을 봤어, 그림자가 오래오래 썩은 잇몸처럼 부식해 갈 때, 무덤 속에서 평온해진 나를 봐
누군가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야 했어, 일부러 슬펐고 일부러 공허하고 일부러 웃을 거야, 내 안을 견디고 간 여자들은 미쳐버렸고, 내 겉을 훔쳐보던 남자들은 식물처럼 죽어버렸지, 이번 생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이상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맥박만을 믿고 있었어
손목 끝으로 길어지는 흉, 계약되지 못해 죽어간 저녁의 아기들, 늙은 파충류처럼 늘어지는 육체, 무의미로 자욱해지는 무릎들, 그리고 한 벌의 생을 불경하게 소일하는 내 안의 붉은 여자들
얼음 같은 날들에 갇혀 수면제를 먹었지, 자상하게 안아 주던 이도 있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나눈 섹스는 물의 공포가 되어 흘러내렸어, 한 달 치 수면제와 헤네시 한 병이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겠지, 욕조 안에 두고 온 춥고 지루한 검은 멍들을 이제 청색 테이프로 바르고 있어
—《문장웹진》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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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 1985년 대구 출생. 2012년 하반기《시와 반시》신인상으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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