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들
김신용
실버들은 가느다란 줄기들을 머리카락처럼 늘어뜨린 나무
물가에서 꼿꼿한 자세를 지닌 듯하면서도 어딘가 구부정해 보인다
비탈진 물가에서는 곧 미끄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버들은 무언가를 굽어보는 듯한 표정을 갖고 있다
확신에 찬 대답으로 지팡이를 짚은 듯 구부정하면서도 꼿꼿해 보인다
그렇게 물가에 선 나무일수록 등걸에는 고집 센 옹이가 박혀있고
어떤 질풍노도의 시간도 견뎌왔다는 듯 완강하게 바닥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완강한, 고집 센 표정에도 불구하고
실바람에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머리카락 같은 줄기들을 가졌다는 것이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가졌다는 것이다
가령 0이라는 것은 무가 아니라 무한을 품은 함수라는 것을
그 함수 속에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숫자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눈빛으로, 실바람에도 부드럽게 풀어지며 물가에 서 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라도 떠 있으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을 읽을 수 있는, 무슨 학자처럼 풀밭에 앉아있곤 한다
간혹 구름의 도시락을 꺼내, 이 없는 잇몸도 씹을 수 있는 해석으로
한 끼의, 풀밭 위의 식사를 풍성하게 하곤 하지만
그런 실버들이, 밤이면 어떤 자세로 물가에 서 있는지를
0의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없는 듯한, 0
그런 0에서 때론 매 한 마리를 날아오르게도 한다
독거(獨居) 같은, 산정에 홀로 머무르며 낡은 부리와 발톱을 뽑아내고
날카롭게, 다시 돋은 깃털로 공중을 선회하는, 그런 새 한 마리를 날아오르게도 한다
그 0에서, 또 무언가를 숙고하는 자세로 물가에 서 있다
곧 미끄러질 듯 구부정한 자세로,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서 있다
마치 0에서 싹을 틔워
1로 꼿꼿이 자라 오른 나무처럼, 온갖 비바람을 이겨내며
비어있음, 그 텅 빈 공간에서 꼿꼿하게 자라 오른 나무처럼
—《시에》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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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시편』『바자울에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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