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 속의 고양이 (외 1편)
김백겸
공원의 벚나무 숲 속으로 형상과 이름의 관계를 생각하며 저녁 산책을 나갔네
숲속 산책길에서 홀로 오던 눈이 빛나는 고양이야
너는 나를 흘낏 보고
나보다 앞서 오던 길로 달아난다
나는 호랑이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저만치 달아나다가 나를 다시 흘낏 본다
동무도 없이 가는 소롯길에 바람이 으스스 불고
벚나무 낙엽은 오그라져서 발 빠른 쥐처럼 움직인다
갈색 등털에 목덜미가 흰 고양이야
너는 왜 나를 자꾸 쳐다보는가
검은 눈은 공포와 연민이 불꽃처럼 일고 황혼의 해를 받아 더욱 빛이 난다
황금쟁반처럼 떨어지는 태양은 까마귀 울음과 풀벌레 소리 속으로 떨어진다
가시철망 울타리가 나타나고
너는 개구멍을 지나 명부의 어둠 같은 숲으로 사라진다
울타리의 쐐기풀은 날개를 접은 나비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둠이 물줄기처럼 스며든다
너와 나는 그렇게 작별했지
이상한 연인의 비상한 감정으로 헤어졌지
저녁이 오자 캄캄해진 숲
길들이 모두 어둠에 지워져 함정이 된 숲
버드나무 줄기들이 뱀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숲을 지나왔네
달빛이 내린 울타리 주위로 쐐기풀 이파리가 천년 여우의 갈기처럼 빛을 냈네
검은 구름 사이로 저녁 흰 달이 고양이 눈처럼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알아차렸네
고양이 눈 속에서 나는 고양이였음을
고양이는 내가 죽으면 다음 세상으로 안내할 영혼의 친구였음을
기호의 고고학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는 문장처럼 말씀과 사물이 한 몸이었던 행복한 시대의 말이 있었다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던져진 말들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담의 몸처럼 썩고 부서지는 낙엽의 운명이 되었다
말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났으나 대양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에 뜬 물살의 거품이었다
말들은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바위 같은 세계 풍경에 걸리며 인간 의식에 굴곡과 무늬를 만들어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회교 사원처럼
사각형과 원이 중첩된 티베트 만다라처럼
말과 말이 결승문자처럼 얽힌 만화경이 문명이었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 미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인간의 생각들이 말의 요람에서 태어나 말들의 무덤에서 죽었다
제도와 법률과 화폐와 인간이 프로그램한 모든 도구들이 부장품처럼 묻혔다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 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물관의 미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묻혀 드라큘라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
나는 독자들을 비경(秘境)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처럼 지도와 랜턴을 준비해서 캄캄한 흙의 시간으로 내려가 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본다
—시집『기호의 고고학』(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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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 1953년 대전 출생. 1983년 〈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방』『비밀 정원』『기호의 고고학』등. 현재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시와 표현》의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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