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돌의 잠 / 오명선

문근영 2016. 3. 27. 09:05

돌의 잠

 

   오명선

 

 

 

그리하여 햇살 한 번 쬐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긴 장마가 여름을 다 소비한 것

 

발이 그려놓은 무늬가 신발이 될 때까지

새를 앉힌 말뚝이 허공이 될 때까지, 바닥에 날개를 짓이기며

 

무르팍으로 키워온 숲이기에

저녁은 새의 둥지를 다 가져도 펴지지 않는 등이다

 

누가 저 등에 얹힌 단단한 잠을 깨울 것인가

 

긴 생각을 지우듯,

문득 돌은 잠행하는 침묵이 아니라

앞 장을 읽고 있을 때 이미 뒷장의 결말이 책장을 덮는, 한 권의 소설이라면

 

온 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저녁은

깊은 어둠이거나, 설익은 열매일 것이다

 

새를 물고 가는 노을이 달빛을 완성하는 동안

열리지 않는 계절은 벽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살찐 짐승들의 동정을 돼지꼬리표로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답 없는 봄의 안부를 베고 누워

죽은 새의 깃털을 빗질하는 구름의 시간, 수천 년을

 

걸어온 발이

한 점 바람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시와 미학》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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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선 / 1965년 부산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오후를 견디는 법』.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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