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의 행성 (외 1편)
권민경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작업 걸 땐 빤한 멘트
뻔히 웃는 얼굴
전생에 사람이었던 개는 웃는 얼굴이란다
개들은 목줄을 매고도 즐겁다
팽팽히 목이 졸린 채 일어서는 흰둥이
당신에게 전할 말은 단지
개에게 손을 내밀지 말아요 주인이 싫어해요
한밤의 벤치 위
우리는 혓바늘을 내밀고 터럭처럼 가벼운 말들을 쏟아냈다
골목에 버려질 용변 봉투
검은 발바닥을 닦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나겠지
자꾸 주둥일 들이밀던 개
자정이 넘어도 바삐 걷던 사람들
높아졌다가 낮아졌던 우리의 음성이 줄을 질질 끈다
구정물이 가득한 대야
유난히 밝았던 금성
당신은 조심스럽게 저건 무슨 별이냐고 물었다
—《현대시》2012년 9월호
대출된 책들의 세계
날 읽으러 가자
사회인류학에서 갑자기 동물학으로 넘어가고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푹 꺼지고 마는
나무들의 납골당, 납골당 정글이야
봐 한눈파는 사이
누군가 내 기억을 데려갔잖아
전집들은 자리를 비워 놓고 모른 척하네
구멍 사이에서 얼굴들이 힐끔힐끔 쳐다봐
얼굴은 또 다른 얼굴들로 바뀌네
보고 싶었고 보기 싫었던 모든 얼굴
퀴리 부인이 라듐을 정제하고 학교 앞 컵 떡볶이 아줌마가 떡볶이에 이 쑤시갤 찔러줘요 올챙이들은 피를 흘리며 흙바닥에 누워 있고 요술 공주 밍키가 어른으로 변신하는 동안 난쟁이 아줌마에게 다방 언니가 너 몇 살이니 물어봐요 네로 황제로 분장한 코미디언이 짜증을 내면 나에게 깨물린 친구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져요 외할머니는 라디오를 들으며 셔틀콕을 만들고 혼수상태의 친할머니가 침대 위에서 헛소릴 하고 철가방 들고 배달 가는 엄마 뒤를 새끼 밴 쫑이 쫓아가고 실종된 아이들 얼굴이 담긴 전단지가 벽에 빼곡한데
머리 위로 후드득 지나간 길이 쏟아져
되돌아가려 해도 밟은 자리마다 꺼져 버리네
나를 조사한
나학생백과사전 나여성백과사전 나민족백과사전
모두 자라나는 정글이야
내일을 재촉해도 건너뛰지 못하지
내 몸속 수많은 얼굴들의 세계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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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경 /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201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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