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達城)
전경
근경
토성
관풍루 주변
관풍루
•지정 번호; 사적 62호
•소재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1) 달성공원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삼국시대
•분류; 성지[성곽]
•내용; 대구 달성은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위치하며,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 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내당동(內唐洞) 일대의 구릉에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있었으나, 1923년 일부가 발굴되었을 뿐이고 지금은 시가지 확장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지정 면적은 10만 5,238.5㎡[약 3만 1,890평]에 이른다.
1968년 10월 지금의 달성공원 입구에서 남쪽으로 150m 지점의 성벽 일부를 절단하였을 때 아래쪽 암반 위에서 김해 회현리 패총(사적 2호)과 같은 시기의 유물층을 발견하였으며, 위쪽의 토성 축조 기반이 되는 층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성곽은 삼국시대에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 월성(사적 16호)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삼한시대 이래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생활 근거지에 쌓은 자연 발생적인 성곽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기 사항; 달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석실분[돌방무덤]이 많이 흩어져 있고, 고분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야기(달성 고분 발굴); 일제 강점기 때 달성의 주위에 있던 고분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다. 달성 고분군은 1920년대만 해도 현재의 서구 비산동・내당동 일대의 구릉지대에는 무려 87기나 되는 고분이 군집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지로 변해 모두 없어졌다. 이 87기의 고분 가운데 34호 고분의 발굴 조사는 1923년 7월에 실시되었다. 그 해 봄 달성공원의 서남 후사면 구릉 아래에 새로운 시장을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대지 조성에 필요한 흙을 채취하기 위해 일대의 구릉지를 토취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구릉인지 고분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큰 고분 7기가 파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라 유물 발견이 작업 인부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구 경찰서장이 즉각 토취에 따른 고분 파괴 행위를 중지시키고 총독부에 조사원 파견 요청을 하게 된다. 총독부에서는 당시 경주 지역 유적 조사를 하고 있던 고가와 케이기치[小川敬吉; 1882~1950]과 양각즈미를 조사차 파견했다. 양각즈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고분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봉토와 석실의 석재가 산란한 가운데 토기 조각이 박살난 채로 흩어져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많은 고분이 파괴되고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 대구 경찰서에서 중지시켜 토취가 중단된 고분도 이미 봉토의 상반부는 파헤쳐졌고 무너진 석실의 일부가 노출된 채 내부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미 부장된 유물의 일부도 보이고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경찰의 보호에 의해 그나마 현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조사자 중 고가와는 당시 구릉 일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을 측량해 모두 87기가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고분마다 번호를 부여하여 분포도를 작성했다. 이때 경찰에서 중지시킨 고분이 양각즈미가 책임 맡고 조사한 34호분이다. 34호분은 발굴 당시 외형으로 보아 직경 약 11m, 높이 약 4m 정도의 원형 봉토분이었다. 조사된 석실은 대개 봉토의 중앙부에 만들어졌고 크기는 길이 4.9m, 좁은 쪽 너비 1.32m, 넓은 쪽 너비 1.55m, 높이 약 1.7m, 바닥에는 16㎝ 두께로 작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이 고분은 통로인 연도[널길]이 없는 순수한 수혈식 석실분(竪穴式 石室墳; 구덩식 돌방무덤)으로 판자 형태의 돌 5장을 잇대어 올려 천장을 만들었다. 피장자는 목관 내에 안치되어 있었고 출토된 유물로는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관모(冠帽), 은으로 만든 허리띠 및 장식, 금귀걸이, 수정으로 만든 구슬 등 장신구류, 환두대도(環頭大刀; 고리 자루 큰 칼), 철창 등 무구류(武具類), 말재갈・발걸이 등의 마구류(馬具類), 굽다리접시・토기 항아리 등 옹기류, 목관에 사용된 못 등 다양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처음 발견된 것으로 청동으로 만든 정강이가리개가 있다. 이 정강이가리개는 무구의 일종으로 발목에서 무릎까지 감싸 다리를 보호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수혈식 석실분에서 정식으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발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출토된 유물이 무구 등인 것을 보면 주인공은 남성이며, 또한 고분을 축조한 연대는 5∼6세기경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 고분을 직접 발굴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1922년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광복 전까지 전국의 유적・유물을 발굴했고, 1934년에 개관한 평양 부립 박물관 초대 관장이 된 사람이다. 서봉총 금관과 허리띠 장식을 평양 기생에게 씌우고 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달성 34호분 조사가 완료된 후에도 공설 시장 부지를 매립하기에는 흙이 부족했다. 그래서 부지 조성을 위해 보존이 어렵게 된 고분들을 발굴 조사 후 원형대로 복구하지 않고 봉분의 흙을 매립토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 토지 소유자의 고분 발굴 의뢰와 대구 시가의 발전에 따라 달성 고분군을 전부 보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1923년 10월 23일부터 12월 31일에 걸쳐 일대의 고분 중 봉토가 비교적 큰 6기를 다시 발굴 조사하게 된다. 조사된 고분은 원형의 봉토를 갖춘 무덤으로 중앙부에 석실을 마련한 후 위에서 시신을 석실로 내려서 안치하는 소위 수혈식 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이었고, 규모가 작은 석실을 함께 마련하여 부장품(副葬品; 껴묻거리)을 넣은 고분도 있었다. 대부분 강돌과 할석(割石; 사각으로 깬 돌)을 이용해 석실 벽을 구축했고 천장은 판자 모양의 화강암 여러 개를 아귀 맞춰 덮었다. 재미있는 것은 벽면이나 천장의 틈새를 짚이 섞인 점토를 발라 벽면을 고르게 한 점인데 이것이 바로 이 고분의 특징이기도 하다. 6기의 고분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귀걸이 등 장신구류와 환두대도 등 무구류, 말재갈 멈치 등 마구류, 토기 등 용기류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37호분에서는 주곽과 부곽에서 각기 금동관이 출토되어 무덤 피장자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 유물이 되었음은 물론 1920년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이후 대구 지방에서도 출토 예를 보여준 것이다. 금동관에 버금가는 중요한 유물로 55호분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를 들 수 있다. 환두대도는 매우 독특한 금동제품으로 하나의 칼집에 두 자루의 칼이 각기 들어갈 수 있도록 했으며, 각각의 칼집 밖으로 보다 작은 칼집을 덧대어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아무튼 대구 달성 고분군은 1923년 조사 당시 총 87기가 확인되었으나 이것은 외형상으로 봉토가 확실한 것에 국한된 것으로 봉분이 없었던 고분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완전히 시가지로 변하여 그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정확히 어떤 경로로 없어진 것인지 확실치 않다. 당시 작성된 고분 분포도를 보면 이 6기가 조사된 후에 토취 때문에 나머지 고분도 그 시기에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 구명에 있어서 중요한 유적을 완전히 인멸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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