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이견대(利見臺)

문근영 2016. 1. 12. 00:49

경주 이견대(利見臺)



이견대와 대왕암


전경


이견대에 복원한 정자(이견정)


이견정 현판


이견대에서 바라 본 대왕암


지정 번호; 사적 159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지정일; 196781

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원년(681)

분류; 기타 유적지

내용; 경주 이견대는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大王巖)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 정신을 받들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681(통일신라 신문왕 원년)에 세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문왕은 부왕인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신문왕이 이어 완성하였는데 금당 아래에 용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그리고 용이 나타난 곳을 본 곳이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전한다. 또 같은삼국유사에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용으로부터 흑옥대(黑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았다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에 의하면, 어느 왕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 위에 건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지정 면적은 4,142[1,255]이다.

  이견대 터에 관하여는 현재 누정 건물이 있는 장소라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1968년 그 곳을 시굴한 바 몇 기의 주춧돌자리 비슷한 적심부가 나타났으나 신라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이견대 터로 확정짓지 못하였다. 그러나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 문헌에는 이견대 터가 이견원 옆에 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현 누정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의 이견원 터로 추정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현재 누정이 있는 위치의 뒤 언덕 위에서 신라시대 기와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근거로 이곳이 원래의 이견대 터라는 견해도 있다.

특기 사항;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利見(이견)’이라는 말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에 나오는 飛龍在天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이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이다. 발굴 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근래에 삼국 통일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바라보는 절벽 위에 누정(樓亭) 형식의 건물을 건립하고, ‘利見臺(이견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야기; 신라 31대 신문왕이 그 부왕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범을 막겠으니 동해 바닷가에 장사 지내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의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의 대왕암에 수장한 뒤 부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에 해관 파진찬(波珍飡, 4/17관등) 박숙청(朴夙淸)이 급히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金春質)을 불러 점을 친 즉 문무왕이 용이 되어 삼한을 보호하며 김유신을 대신으로 하여 하강시켜 왕에게 큰 보물을 전할 징조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동해안에 나아가 바라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 머리 같고, 그 위에 한 그루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한다. 다음 날부터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는 소용돌이가 있은 뒤 세상이 평온해지자 왕이 친히 바다를 건너 산에 올라 아무리 바라다보아도 용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기다리다 지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은 문무왕과 김유신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대나무로 나타난 것이므로 이 대나무를 베어서 합쳐 피리로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돌아와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 때는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지므로 그 피리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고, 만파식적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후세 사람들이 정자를 지어 만파정(萬波亭)이라고 불렀으며 피리가 보관된 곳을 천존고(天尊庫)라 불렀다 한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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