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전경
전경
수중릉 근경
수중릉 근경
대왕릉 내부
•지정 번호; 사적 158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해중[대왕암]
•지정일; 1967년 7월 24일
•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원년(681)
•분류; 능
•내용; 경주 문무대왕릉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 속에 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러왔다. 이 대왕암이 신라 30대 임금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문무왕은 본명이 법민(法敏)이고,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또한 병부(兵部)・창부(倉部) 등 중앙 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 통치를 위한 5소경 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 밖에서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정 면적은 12만 3,951㎡[약 3만 7,560평]에 이른다.
대왕암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인공 수로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7m, 너비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 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특기 사항;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야기; 감은사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으며, 경주에서는 34㎞, 포항에서는 32㎞이다. 절터의 동쪽 동해 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암이 바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며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문무왕은 재위한 지 21년만인 681년 세상을 떠났는데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했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신라의 강토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던 문무왕은 동해 입구에 가람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왕이 돌아 가셨으므로,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하였던 것이다. 일국의 군왕으로서 사치와 영화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죽어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고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화장하여 산골(散骨)할 것을 당부한 유조(遺詔)는 그 탁월한 인품을 짐작케 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신문왕을 거쳐 이후 경덕왕(景德王) 대에 이르는 동안 신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융성과 번영을 누리고 찬란한 민족 문화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왕은 등극하면서 곧 부왕의 뜻을 받들어 선조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역사를 진행시켜 즉위하던 해(681년) 절을 이룩하여 감은사라고 했다.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이 된 부왕이 조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감은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쌍탑이 배치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다. 절을 낙성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신비스러운 피리를 얻었다고 한다. 해관이 아뢰기를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점을 치게 했더니 일관이 아뢰었다. “문무왕과 김유신(金庾信) 공의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실 징조입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견대(利見台; 사적 159호)에 가서 바다를 살폈다. 이튿날 산 위에 있던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컴컴해 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자 용이 대나무로 된 피리를 바쳤다. 그 피리를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며, 홍수 질 때는 비가 개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효소왕(孝昭王) 때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던 부례랑(夫禮郞)이 피리를 불자 살아 돌아왔으므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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