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문근영 2016. 1. 4. 06:03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



전경


전경


근경


전경


근경


전경


전경


전경


원경


금당지


북회랑지



용연


발굴 시 노출된 유구


1950년대의 모습


지정 번호; 사적 31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2(682)

분류; 절터

내용; 경주 감은사지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의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 석탑(국보 112)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 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682(통일신라 신문왕 2)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大王巖)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감은사의 금당 밑에는 해룡이 된 문무왕의 넋이 내왕할 수 있게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따라서 금당 밑은 교량 구조와 같은 돌로 된 기단을 형성하여 공간을 두고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려놓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지정 면적은 26,807[8,122]이다.

  감은사지에 대한 조사는 1959년과 다음 해 초까지 서석탑의 해체 복원과 더불어 국립 박물관에서 실시한 바 있지만 이때는 가람의 형식만을 확인하는 간이 조사에 그쳤다. 그러나 1979년과 19802년간에 걸쳐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조사되어 절터의 성격과 전모가 밝혀졌는데 유구와 유물로 보아 이 절은 고려 때까지도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람의 규모는 동서 회랑 간의 중심 거리가 약 70m이고, 중문 터에서 강당 터까지의 중심 거리가 63.7m로서 가람의 외곽선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가람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남향을 하였는데 남북축 선상에 남으로부터 중문금당강당이 놓이고, 중문과 금당 사이 양옆에는 3층 석탑이 놓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쌍탑식 가람을 보인다. 또 강당의 동서 양측에는 보칸 3칸의 간살이 넓은 직사각형 건물 터가 동서축으로 놓여 이 양끝 남변에서는 동서의 회랑(回廊)이 연결되어 있다. 이 강당 터 양측의 직사각형의 건물 터는 규모로 보아 승방(僧房) 터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3층 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구조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건축 자료인데 상하층의 거대한 기단 위에 몇 개로 나누어진 석재를 조합하여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이루고 특히 하층 기단 주위에는 탑구로 보이는 시설을 대석으로 맞추어 깔고 있음이 다른 신라 석탑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초기적 수법을 나타내는 석탑이다. 19591차 발굴 조사 후 실시된 서탑의 해체 수리 시 3층 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서 화려한 사리 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지난 1996년 동탑의 해체 수리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 장치가 발견되어 주목을 끈 바 있다.

특기 사항; 감은사는 황룡사(皇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야기;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 터는 용이 드나들던 절터로 유명하다. 이 절은 682(신문왕 2) 신라 31대 신문왕께서 부왕 문무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대 왕 중에서 삼국 통일을 이룩하신 성군이시다. 68171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생전에 지의법사(智義法師)를 불러 내가 죽은 후에는 동해 바다에 장사를 지내 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말한 바 있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때 유언하시기를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싸움이 쉴 날이 없었다. 이제는 삼국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무기를 녹여 호미, 괭이를 만들게 되었고, 세금도 가벼워지고 부역을 덜게 되었으니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는 아직도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키겠으니 나의 유해는 동해에 장사 지내라.” 하고는 또 태자는 재상들의 뜻을 존중히 하고, 아래로는 뭇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써 교화할 것을 잊지 말라. 조상님으로부터 이어 받은 나라의 보좌는 잠깐 동안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 태자는 내관 옆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또한 세월이 가면 산천도 변하고 인간도 세대도 바뀌어 지는 것인데 오왕이 묻힌 북산 무덤에서 금비둘기의 찬란한 빛을 지금엔 볼 수 없고, 위왕이 묻힌 서릉을 바라보아도 오늘엔 동작이란 이름만 남아 있더라.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던 위력 있는 임금일지라도 끝내는 한 줌의 흙더미로 변하고 마침내는 나무꾼 아이들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와 토끼들이 굴을 파는데 죽은 사람 일에 큰 비용을 들이는 것은 재물만 낭비하는 일이요. 사람들의 수고만 하는 일일 뿐, 영혼을 오래토록 고요하고 평안하게 하는 일은 못되는 것이니라. 죽은 사람의 일에 많은 경비를 들이는 일은 내가 일찍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임종한 뒤 10일이 되면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인도식으로 화장하여 장례하고, 상복은 우리 옛 풍습에 따라 입어라. 상례는 힘써 검소하게 하고, 변방에 있는 성이나 주와 현의 과세는 필요 없으면 마땅히 철폐할 것이며, 불편한 법이 있으면 곧 편리하도록 고치게 하라. 이 뜻을 전국에 알리고, 주사자는 이를 어김없이 시행토록 하라.” 하셨다. 다음 위를 이으신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동해 중에 있는 바위섬을 파서 못을 만들고, 그 속에 선왕의 유골을 봉안한 다음 동서남북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아 화룡 하신 대왕님이 바다에 나갔다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으니 이 무덤이 세계에 유래 없는 수중암이다. 신문왕께서는 다시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웠는데 절 이름은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는 수중왕릉에서 대종천(大鐘川)을 거슬러 1쯤 올라 간 곳에, 뒤로는 용대산(龍大山)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 용담을 내려다보고, 맞은편에 솟은 용마전산(龍馬前山)을 안산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법당 터 앞에는 지금 신라의 석탑으로 제일 거대한 두 기의 3층 석탑이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다. 이 절의 특이한 구조는 법당 밑에 돌로 짠 굴이 있는데 이 굴은 대왕께서 화신한 용이 법당으로 드나들 수 있게 설계된 것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에는 대종천 어구에서부터 15리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하고, 20년 전 까지만 해도 법당 계단 밑에 용이 드나드는 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문무대왕께서는 살아서 생애를 모두 나라를 위하여 바치셨는데 죽어서 그 시체까지 물에 잠기어 용이 되어 감은사 법당으로 드나 드시며 나라를 지키셨던 것이다. 이에 감은사는 호국의 사원이고, 그 곳은 용이 자라던 곳이며 또 이견대(사적 159)는 대왕바위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바라보던 곳이라고 전한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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